노벨상급 연구를 하려면 소수의 스타 과학자에게 연구비를 몰아주기보다 많은 연구자에게 소규모 연구비를 나눠주는 것이 낫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Panchenko Vladimir/Shutterstock

노벨상을 받으려면 될 사람에게 연구비를 몰아줘야 할까 아니면 적더라도 많은 사람에게 나눠줘야 할까. 큰 나무를 얻으려면 일단 씨를 많이 뿌려야 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노벨상을 받을 만한 성과는 이미 정립된 연구 분야보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도전적인 연구에서 나오므로 소액 연구비를 다수에 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쓰쿠바대 의대의 오니와 로수케(Ryosuke Ohniwa) 교수 연구진은 최근 국제 학술지 ‘플로스 원(PLoS ONE)’에 발표한 논문에서 “일본 생명과학과 의학 분야에서 정부 연구비를 500만엔(한화 약 4500만원) 이하로 많은 연구자에게 나눠주는 것이 소수에게 거액의 연구비를 주는 것보다 더 효율적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거액의 연구비를 스타 과학자에게 몰아주는 ‘큰 과학(big science)’보다 작은 연구비를 많은 연구자에게 배분하는 ‘작은 과학(small science)’이 노벨상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말이다.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두 명 스타 과학자보다 다수가 참여하는 집단 지성이 창의적인 해결책을 줄 수 있다는 최근 과학계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논문 인용회수 대신 ‘이머징 키워드’ 빈도로 판정

일본에서 기초과학 연구자들은 주로 일본학술진흥협회로부터 과연비(科硏費)라는 이름으로 연구비를 받는다. 한국연구재단이 개인 연구자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는 것과 비슷하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과학계에서는 소수의 뛰어난 과학자에게 연구비를 집중하는 것과 다수에게 소액의 연구비를 배분하는 것 중 어느 쪽이 혁신적인 연구 성과로 이어질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오니와 교수 연구진은 1991년부터 2013년까지 일본의 생명과학과 의학 분야의 과연비 투자를 통해 어느 쪽이 노벨상급 연구 성과를 내는 데 효율적이었는지 분석했다. 지금까지 연구비 투자 효과는 주로 논문 인용회수로 평가했다. 하지만 오니와 교수 연구진은 인용회수를 따지지 않았다. 나중에 노벨상 수상으로 이어지는 연구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경우가 많아 처음에는 영향력이 낮은 학술지에 논문이 실리기 때문이다. 그만큼 처음에는 인용회수가 낮을 수밖에 없다.

연구진은 대신 새로운 연구 주제를 뜻하는 ‘이머징 키워드(emerging keyword, EK)’의 숫자를 따졌다. EK는 생명과학과 의학 논문에서 특정 연도에 사용 빈도 증가율이 상위 5%에 해당되는 용어로 정의했다. 이를테면 1989년 노벨 의학상은 ‘레트로바이러스 종양 유전자의 세포 기원’에 대한 연구에 돌아갔는데, 1980년 EK인 ‘바이러스의 종양 유전자 단백질’과 관련이 있다. 논문에 새로 뜨는 용어가 많이 들어갈수록 나중에 노벨상급 연구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연구진은 1989~2010년 발표 논문에서 22만5385건의 EK를 추렸으며, 그중 3556건을 ‘HS(higly succeful, 성공가능성이 이 큰) EK’로 잡았다.

분석 결과 연구비를 받고 3년 안에 논문, EK가 모두 증가했으며, 4~6년 뒤 다시 늘었다. 예상대로 연구비가 많을수록 결과도 좋았다. 하지만 이런 추세는 기하급수적이지 않았다. 연구비가 두 배로 는다고 해서 EK 생산량이 두 배가 되지 않았다. 연구비가 500만엔이 될 때까지는 연구비 규모가 논문, EK 수와 비례했지만, 500만엔을 초과하면 그렇지 않았다. 오니와 교수는 “일본에서 새로운 주제의 연구를 촉진하는 데는 500만엔 이하의 연구비 지원이 더 효과적임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소액 연구비는 과거 연구 실적이 좋았던 연구자에게만 집중되지 않았다. 연구비를 받는 비율이 10~30%일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지만, 좋은 제안서는 상위권 연구자가 내지 않아도 연구비를 받을 확률이 높았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연구진은 “과거 우수한 연구 성과를 낸 기록이 없는 다수의 연구자에게 소규모 연구비를 분배하는 것이 노벨상급 연구 분야를 창출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며 “일본의 연구비 지원기관이나 정책 입안자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과학과 의학연구에는 작은 과학이 더 유리하다”고 밝혔다.

201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야마나카 신야 일본 교토대 교수. 그는 다 자란 세포를 원시세포인 줄기세포 상태로 만드는 유도만능줄기세포(iPSc) 기술을 개척했다. 야마나카 교수는 1999년 나라(奈良)첨단과학기술대학원에 조교수로 응모했고 학교 측은 실적도 없이 전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겠다는 그를 채용했다. 그는 2004년 교토대학으로 옮겨 연구를 완성했다./일본 교토대

◇연구 분야나 단계따라 적정 연구비 규모 달라

이번 연구 결과는 야마나카 신야(Yamanaka Shinya) 교토대 교수가 201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데에서 입증된다. 그는 다 자란 세포를 원시세포인 줄기세포 상태로 만드는 유도만능줄기세포(iPSc) 기술을 개척했다.

야마나카 교수는 1999년 나라(奈良)첨단과학기술대학원에 조교수로 응모했는데, 학교 측은 실적도 없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겠다는 그를 채용했다. 그는 2004년 교토대로 옮겨 연구를 완성했다. 과거 실적과 상관없이 새로운 연구 주제에 뛰어든 학자에게 정부 연구비를 투자한 것이 노벨상으로 이어진 셈이다.

이와 달리 최근 국내에서는 정부가 연구개발(R&D) 예산을 삭감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면서 신진 연구자를 위한 과제의 씨가 마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뿐 아니라 교육부의 R&D 예산까지 삭감되면서 막 연구 활동을 시작한 대학 교수가 지원 받을 수 있는 연구사업의 규모가 크게 줄었다는 것이다.

국내 과학정책 연구자들은 “과학 연구의 씨앗을 많이 뿌리는 것이 나중에 큰 성과를 얻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안준모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아무래도 연구 경력이 짧은 신진 연구자일수록 새로운 연구 주제를 다룰 확률이 높다”며 “그 점에서 새로운 분야를 찾아내는 데 작은 규모로 연구비를 뿌려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는 “누군가 새로운 얘기를 하고, 뒤이어 관련 후속 연구가 확산하면 ‘이머징 키워드’이고, 이것이 나중에 한 분파를 열 정도로 성장하면 노벨상급이 된다”며 “이머징 키워드를 생산하는 데에는 당연히 소액으로 연구비를 뿌리는 게 유리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 결과를 모든 분야나 연구자에게 일괄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안 교수는 “인과관계를 분석하지 않고 기초 통계만 단순히 비교했기 때문에 바로 정책에 반영하기는 위험 요인이 크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모든 연구 분야나 단계에 같은 논리를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바이오 분야와 달리 입자물리학이나 우주론은 고가의 장비나 대규모 집단연구가 아니면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려워 연구비가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성과가 나온다. 학문 분야마다 연구비 투자 규모가 다르다는 말이다.

박 교수는 “노벨 의학상 수상자도 모두 이머징 키워드를 만든 사람이 아니다”라며 “연구 단계에 따라 적합한 연구비 규모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최근 추세대로 3인 공동 수상이라면 최초로 이머징 키워드를 제시한 수상자는 소규모 다과제 지원이 적합하다. 반면 인기 논문을 발표한 중시조(中始祖)에 해당하는 다른 수상자는 중규모 지원, 최종적으로 일가(一家)를 이룬 마지막 수상자는 우리나라 기초과학연구원(IBS)처럼 대규모 지원이 어울린다고 박 교수는 말했다.

참고 자료

PLoS ONE(2023), DOI: https://doi.org/10.1371/journal.pone.02900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