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을 대폭 삭감한 것과 관련해 과학계를 대표하는 한림원 회원들과 정부 관계자들이 3시간에 걸쳐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진행했다. 과학계와 의학계의 원로들은 이 자리에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예산 삭감과 제도 개편을 밀어붙이고 있다며 정부에 대한 유감을 표시했다.
과학과 의학 분야 석학들의 모임인 한국과학기술한림원(과기한림원)과 대한민국의학한림원(의학한림원)은 25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과기한림원회관에서 정부 R&D 투자와 국가 과학기술 경쟁력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토론회에는 유욱준 과기한림원 원장과 왕규창 의학한림원 원장이 참석했고, 현장의 연구자들을 대신해 수십 명의 한림원 회원들이 참석했다.
유 원장은 "이번 예산 삭감과 제도 개편으로 연구자들이 받은 타격이 큰데 이런 상황이 정부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는 것 같아 이번에 자리를 마련했다"며 "한림원 차원에서 연구자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장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자리에는 정부를 대표해 오대현 과기정통부 연구개발투자심의국장이 참석했다. 오 국장은 이번 R&D 예산 삭감 방안을 마련한 핵심 실무진이다. 오 국장은 본격적인 토론에 앞서 R&D 예산 배분·조정 결과와 제도 혁신 방향을 설명했다. 그 뒤를 이어 박태현 이화여대 특임교수와 김소영 KAIST 교수, 오우택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책임연구원, 김재영 서울대 연구부총장의 토론이 이어졌다.
당초 2시간으로 예정된 토론회는 3시간 가까이 진행된 끝에 마무리됐다. 이날 토론자들은 정부의 무리한 예산 삭감과 제도 개편에 대해 우려와 걱정을 강하게 표시했다.
한 참석자는 "기초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신진연구자들에게 일단 뭐든 해보라고 나눠주는 예산이 필요한데, 그런 예산을 없애는 건 기초과학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의견이 나왔다"며 "이제 막 연구를 시작하는 젊은 과학자들에게 밑거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고 밝혔다.
이 참석자는 "과학기술계는 '카르텔'의 실체를 모르는데 이 때문에 예산이 삭감된 것 같은 인상을 받았고, 대외적으로 안 좋게 보일까 우려하고 있다"며 "예산 삭감안과 그 이유에 대해 정부에서 사전 논의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질책도 이어졌고 과기정통부도 이 부분에 대한 잘못을 인정했다"고 말했다.
오대현 국장은 조선비즈와의 통화에서 "예산 배분과 제도 개편 과정에서 과학계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었고, 앞으로는 과학계와 소통을 늘리겠다고 설명했다"고 말했다.
일부 토론 참가자들은 갑자기 예산이 줄어들어 연구자들의 앞길이 막막해졌다고 지적했다. 가뜩이나 과학계에선 의대 쏠림 현상에 대한 우려가 큰데, 젊은 인재들이 이번 조치로 과학보다는 의대를 더 선호하는 현상이 심해질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한 참석자는 "과학계가 예상 가능한 정책과 안정성을 요구했고 과기정통부도 개선하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는 비공개로 진행됐는데 정책과 관련 예산이 계속해서 바뀌는 상황에서 공개 토론에 부담을 느낀 과기정통부의 사전 요청이 있었다고 한 과학계 관계자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