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만의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의 후폭풍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고 있다. 과학계의 석학과 원로까지 우려를 표시하고, 젊은 연구자와 학생들까지 반발에 가세하면서 정부도 당황한 기색이 적지 않게 포착되고 있다. 예산안이 이미 국회에 제출된 상황이지만, 여야 합의를 거쳐 기초연구와 청년에 대한 예산 삭감은 복원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19일 조선비즈의 취재를 종합하면,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내년도 R&D 예산 삭감에 대해 기초·청년 연구자들로부터 현장 의견을 수집하고 있다. 국회 정기 국정감사에서 야당이 이 문제를 집중 제기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과기정통부 사정에 밝은 한 과학계 관계자는 “기초와 청년 연구 부문 예산 삭감에 대한 현장의 문제 제기를 정부도 충분히 알고 있다”며 “이미 예산안이 제출된 상태인 만큼 당장 이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지만 국회에서 여야간 합의를 통해 11월에 삭감된 예산 중 일부를 증액하는 방안이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기획재정부와 과기정통부는 2024년도 국가 R&D 예산안을 올해보다 16.6% 삭감했다. 항목 재분류에 따른 감소분을 제외하더라도 감소폭이 10.9%로 두 자릿수에 달한다. 국가 R&D 예산이 삭감된 건 1991년 이후 33년 만이다.
정부의 발표 이후 과학기술계는 큰 혼란에 휩싸였다. R&D 예산의 비효율을 없애야 한다는 과기정통부의 설명도 통하지 않았다. 과기정통부와 정부출연연구기관 노동조합은 ‘국가 과학기술 바로 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를 결성하고 예산안을 원상회복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좀처럼 공개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는 과학자들도 나섰다. 국내 30여개 기초과학 분야 학회와 협회의 모임인 기초연구연합은 19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기초연구 사업은 치열한 경쟁을 통해 연구비 지원을 받기에 카르텔이나 연구비 나눠먹기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며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든든한 밑바탕 역할을 해왔는데 이번에 전년 대비 6% 가량인 1537억원이 감액됐다”고 밝혔다. 기초연구연합은 “이번 조치로 연구자들의 성장 사다리가 끊어지고 연구의 다양성이 훼손되면서 연구자 풀(pool, 집단)이 감소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 주요 이공계 대학 학생들도 성명을 내고 예산 삭감에 반발했다. 학생들의 집단 반발은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이들은 “과학자들에 대한 존중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과학기술계의 원로들도 한 자리에 모인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는 20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명예회장·고문 간담회를 연다고 밝혔다. 과총의 역대 회장과 한국 과학기술계 원로들이 모이는 이번 간담회의 주제가 R&D 예산 삭감이다. 이 자리에는 정부를 대표해 주영창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이 참석한다.
과기정통부는 연구자 달래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주영창 본부장은 지난 7일 ‘3040′ 청년 과학자들을 혁신 자문위원에 위촉하면서 “내년 전체 R&D 예산은 10% 가량 삭감됐지만 젊은 과학자를 위한 직접적인 지원은 올해보다 42%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도 지난 15일 박사후연구원과 학생연구원 등 젊은 연구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이 장관은 “젊은 연구자들의 성장을 위한 예산은 축소되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내년도 R&D 예산안은 이미 국회에 제출된 상태다. 과기정통부나 기획재정부의 손을 떠난 상황이다. 하지만 야당이 R&D 예산 삭감에 반발하고 있고, 여당 일부에서도 기초·청년 등에 대한 예산은 회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 안팎에서 기초·청년 예산 증액 가능성이 나오는 것도 국회의 증액 논의에 미리 대비하는 차원으로 풀이된다.
더불어민주당의 박광온 원내대표는 지난 18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대한민국은 21세기 들어 국내총생산(GDP)과 비교한 R&D 투자비율이 세계 1위였는데 윤석열 정부가 내년도 국가 R&D 예산을 16.6%나 삭감하며 대한민국 미래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며 “과거로 가는 정부의 R&D 예산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는 여야 국가재정운용협의체를 만들어 내년도 예산안을 마련하자는 제안도 했다.
여당이 당장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하지만 과학기술계의 반발이 거센데다 윤석열 대통령이 평소 지원을 강조한 청년 연구자들마저 예산 삭감으로 설 자리를 잃는다고 반발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여당도 일부 R&D 예산 증액에는 동의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국회 한 관계자는 “국정감사 기간이 지나고 예결위가 시작되면 여당에서도 일부 R&D 사업에는 증액 의견을 낼 것으로 본다”며 “여야가 합의한다면 정부 입장에서도 증액에 반대할 명분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R&D 예산 증액 검토는 없었다는 입장이다. 과기정통부와 기획재정부 모두 R&D 예산 증액은 검토한 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