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바이오의료 분야에 특화된 과학자·공학자 양성을 위해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을 설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KAIST 제공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바이오의료 분야에 특화된 과학자·공학자 양성을 위해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을 설립할 계획이라고 12일 밝혔다. KAIST는 그간 추진해온 의과학대학원의 운영이 성공적이었다고 보고하면서 의사과학자 양성이 중요해지고 있지만, 국내 의사과학자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밝혔다.

의사과학자 양성이 중요해지면서 KAIST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최근 25년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의 37%, 글로벌 상위 10개 제약회사 대표 과학책임자의 70%가 의사과학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겪으며 임상 현장과 최신 연구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의사과학자 양성이 중요해졌다.

KAIST는 지난 2004년 의과학대학원을 설립해 현재까지 184명의 의사과학자를 양성했다. 국내 이공계대학 최초로 의사를 대상으로 선도 연구자 양성을 위한 의사과학자 양성과정(박사학위)을 시행하기도 했다.

KAIST 의과학대학원에서는 의학에서 생명과학·자연과학·공학까지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지닌 28명의 교수진이 연간 총액 330억 원이 넘는 규모의 다학제 융합연구와 교육을 수행하고 있다. 이런 연구 환경은 우수한 실적으로 이어졌다. KAIST에 따르면 연간 100편 이상의 SCI급 논문이 의과학대학원에서 발표된다. 발표한 논문의 논문영향력지수(FWCI) 평균도 3.59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 상위 20개 대학의 FWCI 평균값이 2.06인 것과 비교하면 높은 수준이다.

KAIST 관계자는 “의과학대학원의 연구가 질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데는 설립 이후 KAIST의 연구풍토로 자리잡은 ‘문제해결형’ 접근법이 큰 역할을 했다”면서 “대표적인 사례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의과학대학원 신의철 교수가 수행한 연구”라고 말했다. 신 교수 연구팀은 코로나19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바이러스에 대한 인체 면역반응의 특성을 규명해 코로나19 환자의 치료 전략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문제해결형 접근법은 해결할 과제와 목표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현재 보유한 자원을 고려하여 해결 전략을 수립하는 공학적 방법론이다. 이런 문제해결형 접근법은 의과학대학원에서도 잘 통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진국 교수는 데이터 과학을 기반으로 진단 프로세스를 설계해 유전체 분석으로 희귀질환을 조기에 찾아내 환자맞춤형 치료제를 개발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김 교수의 성과는 난치병 치료에 중대한 돌파구를 마련하여 세계적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의과학대학원 박종은 교수 연구팀은 인공지능을 활용한 빅데이터 분석을 바탕으로 신개념 암 치료에 활용할 수 있는 ‘스마트 면역세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박 교수 연구팀은 수백만 개의 세포에 대한 유전자 발현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종양세포와 정상세포 간 유전자 발현 양상 차이를 찾아내는 딥러닝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의과학대학원의 질병문제 해결에 집중한 혁신적인 연구는 바이오 벤처 창업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의과학대학원 주영석 교수와 이정석 교수는 지놈인사이트를 공동으로 창업했다. 지놈인사이트는 세계 최초로 전장유전체분석(WGS·Whole Genome Sequencing) 기반 암 정밀진단 플랫폼을 만들고, 샌디에이고로 본사를 이전하여 적극적인 해외 진출에 나서고 있다.

의과학대학원은 KAIST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국제적인 교류에도 본격적으로 나섰다. 지난 4월에는 미국 보스턴에서 세계적인 연구중심 병원인 하버드의대 매사추세츠 종합병원(MGH) 및 바이오테크놀로지 기업 모더나(Moderna)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이를 바탕으로 향후 보스턴에 소재한 바이오의료 분야 기관들과 의과학자 양성을 위한 공동연구, 인적교류 등 국제 협력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의과학대학원의 우수한 연구 성과는 의과학대학원 교수와 학생에 대한 높은 평가로도 이어지고 있다. 의과학대학원의 고규영 교수는 2023년 대한민국 최고 과학기술인상을 수상했다. 고 교수는 신의철 교수와 함께 기초과학연구원(IBS) 연구단장으로 활동 중이다. 아울러 의과학대학원 교수 세 명이 한국연구재단의 개인기초 리더과제에 선정되었고, 네 명이 서경배과학재단의 신진연구자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됐다.

그러나 국내 의사과학자 수는 아직 부족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우리나라의 의사과학자는 전체 의사의 1% 미만으로 미국 등 선진국과 비교하면 적다. 의사과학자와 함께 진단이나 치료의 효율적인 방법론을 개발하는 의사공학자 역할에 대한 인식도 커지고 있지만, 의사공학자 양성은 거의 전무하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바이오의료 분야에 특화된 과학자·공학자 양성을 위해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을 설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진은 KAIST 의과학대학원 연구자들. /KAIST 제공

과학계에서는 바이오헬스 산업생태계를 구축하려면 의사과학자, 의사공학자 인재가 모두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이에 KAIST는 메디컬 산업의 대전환에 대비하고자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간 축적해 온 의사과학자 양성 시스템과 노하우를 기반으로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과기의전원)’의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과기의전원은 의학교육 단계부터 과학 및 공학적 소양을 갖춘 의사공학자를 양성하고 이후 박사과정을 통해 MD-데이터공학자·AI전문가·전자공학자·신약개발자 등으로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KAIST가 과기의전원을 신설하려는 이유는 현재의 의과학대학원만으로 미래의 바이오의료 환경에 완벽하게 대응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의과학대학원은 기존의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를 대상으로 운영되는 프로그램으로 생명과학분야의 연구에는 탁월한 성과를 냈지만, 공학분야에서는 아직 성과가 미약하다. 이는 의과학대학원 연구자의 학술적 배경이 의학이다 보니 지금처럼 전공자도 따라잡기 벅찰 만큼 빠르게 발전하는 공학적 자원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기는 어렵고, 최신 기술적 성과를 신속하게 의료 분야에 접목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과기의전원은 과학과 공학을 기반으로 의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데 목표를 둔다. 의학교육단계부터 시작하는 MD-PhD 융합 과정을 운영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KAIST 관계자는 “과기의전원은 이처럼 급변하는 기술과 산업 트렌드를 바이오의료와 실시간으로 조화시키는 특화된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바이오의료의 최신 연구 성과가 산업계에 조기에 안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며 “기존 의학이나 공학과는 다른 융합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바이오헬스 산업의 주역으로 성장한다면 한국도 연간 2조달러가 넘는 글로벌 바이오 헬스산업 시장의 퍼스트무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