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최초로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린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는 1983년생이다. 나이를 따지는 한국 사회에서 1980년대생은 아직 젊은 실무진 축에 속하지만, 과학계에선 위상이 남다르다.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중반까지는 연구자의 역량과 아이디어가 빛나는 시기로 불린다.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노벨상 과학 부문 수상자들이 자신의 핵심 연구를 처음 시작한 평균 연령이 37.9세로 나타났다. 조선비즈는 한국의 기초 과학과 공학을 이끌 차세대 리더들을 독자들께 소개하는 인터뷰 시리즈를 시작한다. 젊은 과학자들은 한국공학한림원과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추천을 받아 선정했다. ‘제2의 허준이’를 넘어서 한국의 첫 노벨상 과학 부문 수상자, 그리고 한국 산업의 미래를 이끌어갈 핵심 인재가 이들에게서 나오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갈수록 치열해지는 첨단 바이오 산업의 기술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의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면서 직접 연구에도 나서는 의사과학자에 대한 필요성이 점점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개인병원 문만 열어도 안정적인 수입을 얻는 의사를 포기하고 미래가 불확실한 연구에 뛰어드는 수는 아직 많지 않다.

김유형(37) 서울대병원 내분비대사내과 교수의 등장에 과학기술계가 기대를 거는 이유다. 충남대 의과대학 석사,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의과학대학원 박사를 거친 김 교수는 정부가 찾고 있는 의사과학자의 롤 모델 같은 인물이다. 카이스트 자연과학대학에서 2년간 박사 후 연구원 생활을 마친 그는 서울대병원 내분비대사내과에서 본격적인 ‘의사과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병원에서 일하고 남는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내는 와중에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같은 유명 국제 학술지에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최근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한 가지 연구 주제를 10년 동안 지원하는 ‘한우물파기 기초연구’ 사업 지원 대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207명의 과학자가 신청해서 단 15명 만이 뽑힐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의사과학자 양성을 주문했지만, 주무부처인 과기정통부나 보건복지부 모두 뚜렷한 해법은 찾지 못하고 있다. 의사과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는 게 의사과학자 양성의 실마리가 되지는 않을까. 조선비즈는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김 교수를 만나 의사과학자로서의 삶에 대해 물었다.

지난 19일 종로 서울대병원에서 만난 김유형 내분비대사내과 교수가 한 우물 파기 과제로 선정된 자신의 연구 주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향후 10년간 그는 연구비 18억2000만원을 지원받으며 표적항암제가 내분비기관에 부작용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갈 계획이다./최정석 기자

-’한우물파기’에 선정됐다. 어떤 의미인가.

“젊은 연구자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업이다. 교수든 연구자든 다들 마음 속에 해결하고 싶은 과제가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그 과제를 평생 풀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특히 내 동년배 젊은 연구자들은 더더욱 그렇다. 승진과 연구 실적에 대한 압박이 강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연구비 따내기도 어렵다. 반면 한 우물 파기 과제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매년 2억원 정도 연구비를 10년간 준다. 각종 보고서와 같이 연구 활동 중간중간에 거쳐야 할 행정 업무도 간소화된다.”

-젊은 연구자가 받을 수 있는 연구비가 그렇게 적나.

“젊은 연구자들이 가장 흔하고 쉽게 받을 수 있는 연구비가 한국연구재단에서 3년간 받는 ‘생애 첫 연구’인데 이게 매년 3000만원이다. 적은 돈은 절대 아니지만 연구비로 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연구원을 필요한 만큼 모집하고 연구에 쓸 기자재를 들이려면 적어도 매년 2억원은 필요하다. 3000만원이면 연구원 1명 데려다 쓸 인건비 수준밖에는 안 된다. 연구자가 자신의 꿈을 충분히 펼칠 만한 연구비를 주는 사업은 찾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연구자의 꿈’보다는 연구 성과가 국가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지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

“지금이 기술패권경쟁시대인 건 부정할 수 없다. 자금은 한정돼있기 때문에 이를 효율적으로 쓰는 것도 중요하다. 다만 통통튀는 아이디어와 날것의 열정을 갖고 있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놀이터’와 같은 연구 환경을 마련해주는 게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젊은 연구자가 각자 갖고 있는 궁금증을 실컷 해결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면 장기적으로 더 많은 부가가치가 창출될 거라 믿는다.”

-한우물파기 과제를 통해 어떤 걸 연구하나.

“간단하게 말하면 부작용 없는 항암제를 만드는 게 목표다. 2세대 표적항암제 중 대표적인 게 혈관 신생 억제제다. 혈관 성장 인자를 억제해서 암 조직이 새로 혈관을 뻗어 장기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는 약이다. 암 조직이 혈관을 만들지 못하면 피가 돌지 않아 제 기능을 못하는 암세포가 늘면서 암 성장이 억제된다. 다만 부작용이 있기 때문에 표적항암제의 부작용을 없애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지난 2019년 김유형 서울대병원 내분비대사내과 교수가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발표한 논문 내용. MST1과 FOXO1이라 불리는 전사인자들의 연쇄작용이 혈관이 새로 생겨나갈 방향(극성)을 정한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어떤 부작용이 있나.

“다른 멀쩡한 장기에 달린 혈관까지 망가뜨릴 수 있다는 점이다. 암 조직에 달린 혈관만 선택적으로 기능을 못하게 만들면 문제가 없겠지만 주변에 있는 다른 혈관들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되면 굉장히 많은 부작용들이 생긴다. 그래서 이번 연구를 통해 암 조직이 장기에 혈관을 뻗어내리게 유도하는 혈관 성장 인자와 더불어 암 조직에 달린 혈관만 갖고 있는 특징적인 단백질과 같은 것을 발견한다면 이를 역이용해 암 조직 혈관만 노리는 차세대 항암제를 만들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나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냈던 논문도 연구 방향이 같은 건가.

“그렇다. 기본적으로 모두 혈관에 대한 논문이다.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논문은 혈관 극성을 정해주는 전사인자(단백질 집합)를 규명한 논문이다. 혈관이 없던 공간에 새로운 혈관이 생기는 과정을 혈관 신생이라 하는데 혈관은 기존 혈관 끝부분이 특정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새로 생긴다. 그 특정 방향을 극성이라 한다.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논문은 혈관 성장에 도움을 주는 전사인자가 혈관이 아닌 내분비기관에 적용되면 해당 기관이 원활하게 기능하도록 도우며 혈관과 전혀 무관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규명해낸 게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논문이다.”

김 교수는 자신의 최종 목표가 ‘부작용 없는 항암제와 노벨상’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암 조직이 장기에 혈관을 뻗어내리게끔 유도하는 ‘혈관 성장 인자’와 함께 암 조직 혈관만 갖고 있는 특징을 발견한다면 이를 역이용해 암 조직 혈관만 표적으로 하는 차세대 항암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3세대 항암제 개발에 기여한 제임스 앨리슨 텍사스대 앤더슨암센터 교수, 혼조 다스쿠 교토대 명예교수가 201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지난 6월 8일 서울 중구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대회의실에서는 한우물파기 과제에 선정된 젊은 과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는 차세대 태양전지 기술인 페로브스카이트로 세계적인 석학의 반열에 오른 박남규 성균관대 화학공학부 교수도 참석했다. 박 교수는 젊은 과학자들에게 조언을 해달라는 말에 “노벨상은 인류의 삶에 기여하고 인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과학기술에 주어진다”며 “노벨상을 받기 위한 연구를 하라”고 강조했다. 특히 이날 박 교수 앞에서 연구 계획을 발표한 김 교수에 대해서는 꾸준히 한다면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연구라고 생각한다며 자신도 의학의 길을 걸었다면 암을 정복하는 게 꿈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6월 8일 서울 과학기술자문회의 대회의실에서는 한우물파기 기초연구 사업에 선발된 젊은 과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각자 연구계획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박남규 성균관대 교수 등이 참석해 젊은 과학자들을 격려했다. 김유형(오른쪽에서 8번째) 서울대병원 교수도 자신의 연구 계획을 발표했다./과학기술정보통신부

-의사가 꿈이었나, 과학자가 꿈이었나.

“중학생 때는 수학이 가장 재밌었다. 그러다 고등학생 때 의학에 관심이 생겼다. 특히 여러가지 임상적 지식을 풀어내는 일을 하고 싶었다. 환자 치료도 좋지만 더 효과적인 치료법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결국 돌이켜보면 연구자가 되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연구 활동을 좋아하게 된 건가.

“어렸을 때 유명한 지식인들을 동경했다. 그들과 같은 역할을 하고 싶었다. 기존 지식을 쉽게 설명하는 지식인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가 되고 싶었다. 불문율처럼 원래 있는 공식이나 법칙을 무작정 따르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작은 거라도 나만의 방식을 만들고 싶었다. 연구가 그런 것 같다. 나만의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들으면 특정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렸으면 한다.”

-연구 활동을 즐기는 게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되는 건가.

“첫 번째 이유이기는 하다. 다른 이유는 책임감이다. 충남대 의대, 카이스트를 거쳐 서울대병원에 오기까지 훌륭한 연구 환경에서 좋은 스승님을 만나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의사는 전문의를 따면 군의관을 해야 하는데 국가에서 전문연구요원이라는 제도를 운영한 덕에 4년간 카이스트에서 연구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혜택을 많이 받은 몸이다. 그만큼 국가와 환자들에게 돌려줄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김유형 서울대병원 내분비대사내과 교수는

2011~2012년 충남대병원 인턴

2012~2016년 충남대병원 내과 전공의

2019~2020년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대학 박사 후 연구원

2020~2023년 서울대병원 내분비대사내과 임상강사

2023년~현재 서울대병원 내분비대사내과 진료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