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받은 지 1년이 됐다. 허 교수의 수상을 계기로 한국 수학계의 위상이 높아지고, 기초과학에 대한 정부의 지원도 늘고 있다. 하지만 허 교수 같은 최상위 수학자의 부상과는 별개로 한국 수학이 처한 현실 자체는 여전히 암담하다는 지적도 있다. 조선비즈는 4회에 걸쳐 허 교수의 필즈상 수상을 계기로 한국 수학계에 불어온 새로운 변화의 바람과 현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명한다.[편집자 주]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지난해 9월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한국 수학계 발전을 위해 '클레이 펠로십' 같은 연구 프로그램 도입을 제안했다. 그 결과 그의 이름을 딴 '허준이 펠로십'이 만들어졌고, 올해 3명을 선정해 본격적인 운영이 시작된다./뉴스1

국내 수학계를 이끌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연구 프로그램인 ‘허준이 펠로십’의 첫 번째 참가자가 공개됐다. 허준이 펠로십은 국내 젊은 수학자를 대상으로 최고 수준의 급여와 연구비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역임한 클레이 펠로십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수학계에서는 허준이 펠로십을 통해 젊은 수학자 양성은 물론 차기 필즈상 수상자 배출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17일 수학계에 따르면 허준이 펠로십에 라준현 영국 임페리얼칼리지런던 박사 후 연구원, 박현준·최인혁 고등과학원 박사 후 연구원 등 3명이 선정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해 허 교수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허 교수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면서 국내 수학계 발전 방안을 물었다. 이에 허 교수는 ‘클레이 펠로십’을 본딴 연구 프로그램의 도입을 제안했고 국내 최고 수준의 수학 연구 프로그램인 ‘허준이 펠로십’이 만들어졌다. 허준이 펠로십은 올해 3명을 시작으로 앞으로 최대 10명까지 확대될 예정이다.

허준이 펠로십 선발을 총괄한 김영훈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는 “한국 수학계를 이끌 잠재력과 자기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인 리더가 될 수 있는 수학자를 선발했다”며 “이들 중 제2의 필즈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라고 말했다.

허준이 펠로십에 선정된 라 연구원은 2014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수리과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편미분방정식이 주요 연구 분야로 물, 공기 같은 유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이나 시공간의 변화를 설명하는 아인슈타인 방정식을 연구하고 있다.

라 연구원은 허 교수와 인연도 있다. 그가 박사 학위 과정에 있던 시기 허 교수는 프린스턴대 인근의 미 고등과학원에 재직하면서 프린스턴대 카페에서 수학 연구를 하곤 했다고 라 연구원은 전했다. 라 연구원은 “당시 만난 허 교수와 인사를 나눴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며 “노트를 앞에 두고 공동 연구자와 의논하는 모습이 감명 깊었다”고 말했다.

라 연구원은 “허준이 펠로십에 선정돼 감사하면서도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며 “연구를 통해 수학계와 사회에 내가 받은 것들을 나눌 수 있는 연구자가 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박 연구원은 지난해 8월 서울대 수리과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고등과학원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대수기하학으로 칼라비-야우 다양체, 교차이론을 다루고 있다. 칼라비-야우 다양체는 물리학의 끈 이론에서 시공의 축소화를 나타내는 나타내기도 해 이론 물리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연구 주제 중 하나다.

최 연구원은 KAIST에서 학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지난 3월부터 고등과학원에서 위상수학을 연구하고 있다. 위상수학 중에서도 기하군론과 기하위상수학이 주요 연구 주제로 군(group)에서 무작위적인 행보를 다루고 있다. 최 연구원은 “깊고 의미 있는 수학 연구를 해보겠다”며 허준이 펠로십 선정 소감을 밝혔다.

허준이 펠로십에 선정된 라준현(왼쪽) 영국 임페리얼칼리지런던 박사 후 연구원, 최인혁 고등과학원 박사 후 연구원./조선DB

허준이 펠로십에 선정된 이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39살 이하의 젊은 한국 수학자로, 각자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허준이 펠로십의 모델인 클레이 펠로십도 박사 학위를 받은 직후의 젊은 수학자를 선정해 성장을 지원하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허 교수는 지난해 7월 필즈상을 받은 후 언론 인터뷰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클레이 펠로십에 선정돼 5년 동안 아무 조건 없이 지원 받았다”며 “이 기간이 내가 자리를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허준이 펠로십에 선정된 수학자들은 이달 19일 문을 여는 허준이 수학난제연구소에 소속돼 5년간 매년 약 1억원의 연구 지원을 받는다. 클레이 펠로십과 마찬가지로 해외 석학들과의 네트워크 구축, 자유로운 연구 환경도 제공된다.

김 교수는 “허준이 펠로우들은 연구비를 활용해 1년에 8개월 가량 해외에 체류하면서 원하는 곳에서 연구를 할 수 있다”며 “한국을 넘어서 세계 수학계에서 활약할 인재로 성장하기 위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허준이 펠로십에 선정된 이들은 도전적인 연구가 가능한 환경을 지원 이유로 꼽았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국내와 해외를 넘나들며 다양한 환경을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최 연구원은 “수학에는 도전적이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연구 주제가 있는 만큼 장기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연구 환경이 필요하다”며 “허준이 펠로십을 통해 이런 여건을 제공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라 연구원도 “허준이 펠로십에 선정됐다는 것 자체가 뜻깊은 일”이라며 “특히 시간적 제한 없이 공동 연구자들이 있는 곳에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수학계에서는 허준이 펠로십 도입으로 인재의 해외 유출을 막고 국내 수학계의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허 교수가 클레이 펠로십을 통해 필즈상 수상자로 성장했던 것처럼 차기 필즈상 수상자가 허준이 펠로우를 통해 성장할 것이라는 것이다.

차기 필즈상 후보로 거론되는 국내 젊은 수학자. 왼쪽부터 오성진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 정인지 서울대 교수, 최경수 고등과학원 교수./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고등과학원

허준이 펠로십과는 별개로 차기 필즈상 수상이 기대되는 젊은 국내 수학자들도 여럿 있다.

오성진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수학과 교수는 블랙홀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편미분방정식으로 학계에 이름을 알렸다.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젊은 과학자상과 포스텍(포항공대)이 선정한 ‘한국을 빛낼 젊은 과학자 3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정인지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는 라 연구원과 마찬가지로 유체를 설명하는 미분방정식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유체의 불안정성과 특이점에 대한 연구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여 지난해 대한수학회가 수여하는 ‘젊은 수학자상’을 받기도 했다.

최경수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는 미분방정식과 미분기하학을 연구하는 수학자로 뛰어난 성과를 이미 인정받고 있다. ‘상산 젊은수학자상’ ‘포스코 과학자 펠로십’ ‘아시아 젊은 과학자 펠로십’에 선정되기도 했다.

최 교수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허 교수가 필즈상을 받은 이후 국내 수학계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늘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앞으로 허준이 펠로십처럼 좋은 제도가 많이 만들어져 한국 수학자에 대한 지원이 계속 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