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흑사병은 당시 유럽 인구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후에도 수백년간 희생자를 만들었고,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최대 2억명으로 추정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흑사병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낳은 감염병으로 기록됐다.

그런데 흑사병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원래 흑사병은 14세기 몽골 제국이 유럽을 침공하며 유럽에 전파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최근 들어 몽골의 유럽 침공 이전에 이미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다는 증거가 잇따라 발견됐다.

영국 프랜시스크릭 연구소 연구진은 30일(현지시각)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4000년 전 영국 유적에서 흑사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세균)의 흔적을 찾았다"고 밝혔다. 영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흑사병의 증거로 몽골 제국의 침공 이전부터 유럽 전역에서 흑사병이 유행했다는 의미다.

흑사병의 원인인 페스트균이 발견된 러시아 볼가강 인근에 매장된 3800년 전 시신. 영국 프랜시스크릭 연구소 연구진은 최근 영국에서 이 시기 흑사병의 흔적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영국 청동기 시대의 흑사병 환자, 공동 매장지서 발견

흑사병은 페스트균(Yersinia pestis)에 감염돼 발생하는 질병으로, 혈액이 응고돼 손·발·코 같은 신체 말단 부위가 괴사하며 죽음에 이른다. 최근에는 항생제를 사용해 빠르게 진단하면 치료할 수 있지만, 항생제가 없던 시기에는 특별한 치료법이 없고 빠른 전파 속도 때문에 한번 유행이 시작되면 막기 어려웠다.

연구진은 과거 흑사병의 흔적을 찾기 위해 청동기 시대였던 4000년 전 영국 유적지 '차터하우스 워런 농장 동굴'과 '레벤 파크' 두 곳에 매장된 시신을 조사했다. 두 곳에서 발견된 총 34구의 시신에서 치아를 채취해 디옥시리보핵산(DNA)을 분석했다. 그 결과 3구의 시신에서 페스트균의 유전자가 발견됐다.

유전자 분석 결과 이들이 발견한 페스트균의 유전체에는 벼룩에게 감염될 수 있는 유전자인 'ymt'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벼룩은 흑사병에 감염된 쥐와 사람을 옮겨 다니며 피를 빨아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이 널리 퍼진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연구진은 이번에 발견된 페스트균이 '후기 신석기·청동기 혈통'으로, 14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페스트균보다 훨씬 전에 유럽 전역에서 유행했을 것으로 분석했다.

페스트균이 발견된 3구의 시신 중 2구가 발견된 차터하우스 워런 농장 동굴은 수십구의 시신 함께 묻힌 공동 매장지로, 이들이 함께 매장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이를 통해 연구진은 페스트균에 감염된 사람들을 공동 매장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토머스 부스 프랜시스 크릭 연구소 고대유전체학연구실 선임연구원은 "함께 매장된 다른 시신이 페스트균에 감염됐지만, 유전자가 발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며 "다만 당시 영국에서 흑사병이 이번 연구에서 발견된 것보다는 적게 전파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랜시스크릭 연구소 연구진이 페스트균의 유전자를 발견한 영국 차터하우스 워렌 농장 동굴. 연구진은 이 곳에 대량 매장된 시신에서 흑사병의 흔적을 발견해 당시에도 흑사병 대량 감염이 있었을 것으로 분석했다.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청동기 시대에도 유럽 전역 휩쓴 흑사병

페스트균이 몽골 제국의 침입 이전부터 유럽에 존재했다는 증거는 최근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페스트균은 2015년 영국 케임브리지대와 덴마크 코펜하겐대 공동 연구진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 연구진은 3000~5000년 전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대규모 인구 이동이 감염병 때문일 것으로 보고 당시 유골을 연구하던 중 페스트균을 발견했다.

당시 발견된 페스트균도 영국에서 발견된 것과 마찬가지로 벼룩에 감염될 수 있는 유전자는 없었다. 이후 지금까지 발견된 청동기 시대 페스트균은 총 17종으로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다양한 종의 페스트균이 과거부터 유럽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 있다. 다만 이들 페스트균은 모두 현재 멸종한 상태다.

과학계에서는 청동기 시대 유럽에서 지역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페스트균이 전역으로 퍼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이 시기 영국에서 페스트균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프랜시스크릭연구소 연구진은 "당시 흑사병은 벼룩이 아닌 쥐를 직접 먹거나, 쥐에게 물려 감염됐을 것"이라며 "또는 유럽 대륙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에 의해 영국까지 흑사병이 전파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청동기 시기 영국인들이 흑사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다소 과격한 치료법을 사용한 흔적도 나타났다. 페스트균의 유전자가 발견된 시신의 턱 뼈에는 외부 힘에 의한 손상이 있었는데, 해부학적 분석 결과 이들은 살아 있는 상태에서 턱을 다친 것으로 드러났다. 흑사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장례절차를 거쳐서 매장된 만큼 치료 도중 숨졌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부스 연구원은 "이번 연구를 통해 과거 흑사병의 전파 경로와 감염병을 막기 위한 독특한 문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며 "현재까지 남아 있는 페스트균과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샘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참고자료

Nature Communications, DOI: https://doi.org/10.1038/s41467-023-38393-w

PNAS, DOI: https://doi.org/10.1073/pnas.2116722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