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제1차 지방과학기술진흥종합계획을 발표하며 지역의 과학 생태계 조성에 나선 지 올해로 25년이 지났다. 하지만 국가 과학기술 연구개발(R&D)에서 예산과 인력 같은 지표를 보면 수도권 쏠림 현상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비즈는 4월 ‘과학의 달’을 맞아 지역의 과학기술 혁신 역량을 점검하고, 수도권과 지역이 함께 성장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해 봤다.[편집자 주]
지난 21일 오후 4시쯤, 강원도 강릉의 강릉과학산업단지에 있는 옵트바이오를 방문했다. 옵트바이오는 천연 기능성 소재를 이용해 기능성 화장품이나 건강기능식품 원료를 만드는 중소기업이다. 수도권의 중소기업도 젊은 직원을 구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옵트바이오 연구동과 생산동에 들어서자 ‘2030′ 청년 직원이 적지 않았다. 금요일 늦은 오후였지만 젊은 직원이 가득한 연구동과 생산동 모두 활기가 돌고 있었다.
회사를 안내한 정광호 옵트바이오 대표에게 비결을 물었더니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이름이 나왔다. 정 대표는 “KIST 강릉분원 천연물연구소가 바로 옆에 있으니 수시로 왔다갔다하면서 연구와 관련된 협의도 하고 도움도 받고 있다”며 “KIST가 기술이전하는 과정에서 기술적인 것뿐만 아니라 절차적인 것들도 많이 도와주면서 회사가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옵트바이오는 KIST 강릉분원 노주원 책임연구원 연구팀의 피뿌리풀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한 기술이전을 받았다. 피뿌리풀은 몽골 지역에서 상처 치유와 피부재생 목적으로 사용된 약초인데, KIST 연구팀이 이를 바탕으로 피부노화 개선에 효과가 있는 천연물 소재를 개발해 국내·외 특허를 출원했다. 정 대표는 “피뿌리풀을 이용한 원료가 미백이나 주름 개선에 효과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제품화에 나섰다”며 “그린바이오 첨단 국가산업단지를 강원도에 유치하는 것도 KIST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옵트바이오는 지역 대학인 강릉원주대 학생들을 채용해 연구 인력으로 쓰고 있다. 출연연 지역 분원과 지역 기업, 지역 대학이 함께 성장하는 모델을 안착시킨 셈이다.
옵트바이오에 새로운 원동력을 선사해 준 KIST 강릉분원은 옵트바이오와 같은 강릉과학산업단지 안에 있다. 옵트바이오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다.
장준연 KIST 강릉분원장은 옵트바이오는 KIST 강릉분원이 낸 성과의 한 가지 사례일 뿐이라고 말했다. 장 분원장은 “연구 결과가 논문에서 끝나면 안 되고 지역 입장에서는 돈으로 이어져야 의미가 있다”며 “KIST 강릉분원이 출원한 특허를 기업에 이전해서 사업화한 뒤에 받은 로열티가 작년에만 17억6000만원에 달했다”고 말했다. KIST 전체가 작년에 받은 로열티 수입이 80억원 정도인데 KIST 강릉분원이 20% 이상을 책임진 셈이다. KIST 강릉분원의 연구인력은 전체의 8% 수준에 불과하다.
KIST 강릉분원의 성과는 다른 지표로도 확인할 수 있다. KIST 강릉분원이 낸 논문은 1192편, 이 가운데 학술적 권위를 인정받은 과학논문인용색인(SCI)에 등재된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이 1049편에 이른다. 이 밖에도 특허 출원은 724건, 기술이전은 61건 등이다. 총 예산 대비 기술료 수입으로 계산하는 출연연 연구생산성 지표도 5.48%로 출연연 평균(2.25%)을 두 배 이상 웃돈다.
장 분원장은 “강원도 인구가 전체의 3%밖에 안 되는데 산업이 없다보니 젊은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며 “KIST 강릉분원이 나서서 강원 지역의 바이오 관련 중소기업 53개사를 패밀리 기업으로 만들어서 제품 전시도 하고, 네트워킹도 도와주고, 기술이전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과학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이 전국에 세운 지역 분원은 올해 3월 기준으로 103개에 이른다. 하지만 100개가 넘는 모든 지역 분원이 KIST 강릉분원처럼 성공적으로 지역 사회에 안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된 성과 없이 목적을 잃고 방치되다시피하는 분원이 적지 않다.
2003년 5월에 생긴 KIST 강릉분원은 103개의 출연연 지역 분원 중 가장 먼저 생긴 ‘1호 분원’이다. 동시에 과학기술계나 출연연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지역분원 성공사례다. 가장 오래된 동시에 가장 탄탄한 내공을 자랑하는 비결은 뭔지, 다른 출연연 지역 분원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뭔지 알아봤다.
◇정치인 입맛 따라 만들고 시간 지나면 출장사무소로 전락
출연연 지역 분원은 설립 목적과 설립 절차가 정해져 있다. 출연연 지역 분원은 지역의 연구개발(R&D) 체제 안에서 과학기술 지식이전, 지역산업 경쟁력 강화, 우주 연구인력 및 장비 활용 등의 역할을 맡고 있다. 수도권이나 대전(대덕특구)에 집중된 R&D 역량을 지역 곳곳으로 이전하기 위해 만든 것이 출연연 지역분원이다.
하지만 정작 제대로 작동하는 출연연 지역 분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출연연을 관리하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는 5년마다 출연연 지역 분원을 평가하는데 가장 최근인 2020년에는 53개 지역 분원에 대해 평가를 진행했다. 이 중 ‘우수’ 등급을 받은 건 단 4개에 불과했다. ‘보통’이 36개였고, ‘미흡’이 13개였다. 단순 계산으로도 ‘미흡’ 등급이 ‘우수’ 등급보다 3배나 많은 셈이다.
김성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지역혁신정책센터장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지역 분원은 지역 기업이나 연구기관과 협업하고 있지만, 규모가 작은 지역 조직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지방자치단체(지자체)와 출연연이 함께 힘을 모아 만든 지역 분원이 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걸까. 관계자들은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든다. 우선 처음부터 수요도 없고 필요도 없는데 지자체나 정치권의 무리한 요구로 분원이 설치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전라북도에 분원을 세운 한 출연연 관계자는 “정치권이 출연연 목을 비틀어서 강제로 지역 조직을 만들 게 하니 불협화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지역에 필요한 특화된 산업에 맞춰서 분원을 설립해야 되는데 선거 앞두고 그냥 부지랑 예산 줄 테니 오라고 멱살 잡는 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더 큰 문제는 그렇게 설립해놓고 해당 정치인이 다음 선거에서 낙선하면 지자체에서 오는 지원이 다 끊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출연연 지역 분원을 만드는 절차가 무시되는 것도 문제다. 출연연이 지역 분원을 설립하려면 시범사업을 거친 뒤에 타당성조사도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권이나 지자체의 무리한 요구로 이런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다. 중견기업연구원이 2020년에 국회예산정책처에 제출한 출연연 지역조직 운영실태 분석 보고서를 보면 2010년 이후 설립된 출연연 지역 분원 29개 중 타당성 조사를 거친 곳은 10개에 불과하다. 3분의 2가 제대로 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설립한 셈이다.
NST 관계자는 “출연연 지역조직 설립을 어렵게 하자는 기조가 있지만 여전히 정치권과 지자체에서 압박을 많이 넣고 있다”며 “지자체에서 출연연 지역 조직을 유치하면서 여러 조건을 제시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원이 끊기는 경우가 많고, 지역 분원의 설립 목적인 기초 연구개발 외에 지역을 위한 협력 사업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한 출연연 지역 분원에서 근무하다 대학교수로 자리를 옮긴 A씨는 지자체와 출연연 모두가 허술한 지역 분원 운영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A씨는 “출연연이라는 게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자율적인 연구를 위해 만들어진 조직인데, 지역 분원에서는 지자체 지원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며 “기초 연구 성과는 본원보다 잘 나오기 어렵고 그렇게 되다보면 연구자들이 사기가 떨어지는 악순환이 생긴다. 본원에서도 인력이나 장비 같은 부분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고, 심지어 문제가 있는 인사를 유배 보내는 용도로 지역 분원을 쓰기도 한다”고 말했다.
◇출연연 분원은 지역의 ‘두뇌’이자 ‘다리’… 균형을 잡아라
그렇다면 출연연 지역 분원은 어떻게 해야 지역 사회에 자리 잡고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걸까. KIST 강릉분원이 하나의 케이스스터디 사례가 될 수 있다.
KIST 강릉분원은 전체 인력이 183명으로 출연연 지역 분원 중에서도 덩치가 큰 편이다. 이 중 정직원이 60명인데 연구자가 46명에 달한다. 박사후과정 연구원과 인턴이 57명이고, 학생도 66명이다. 정직원을 제외하면 ‘2030′ 청년 인재들로 그 자체로 지역 사회에 활력이 된다.
사람이 많다고 무조건 성과를 낼 수 있는 건 아니다. KIST 강릉분원이 연구 성과와 기업 지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던 건 의도적으로 균형을 잡았기 때문이다. 기초 분야에 대한 연구가 ‘두뇌’ 역할이라면 지역 기업 지원은 ‘다리’ 역할이다. KIST 강릉분원은 두뇌와 다리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커지지 않게 균형을 잡은 덕분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장준연 분원장은 연구비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KIST 강릉분원의 올해 연구비는 212억원이다. 이 중 수탁사업으로 얻는 연구비가 110억원, KIST 고유 사업(직접비)으로 얻는 연구비가 102억원이다. 수탁사업과 직접비가 거의 5대 5로 균형을 이룬다. 장 분원장은 “수탁사업은 다른 연구기관이나 대학과 경쟁을 해서 따오는 연구비인 만큼 수탁사업이 많다는 건 경쟁력이 높다는 걸 의미한다”면서도 “하지만 수탁사업 비중이 너무 높으면 그때그때 필요한 연구 위주로 진행하다보니 원천기술이나 미래를 내다보는 연구를 할 수가 없다. 5대 5의 비중이 황금 비율”이라고 설명했다.
KIST 강릉분원은 천연물 소재를 활용한 식품이나 의약품 개발을 주로 진행한다. 이 때 중요하게 여기는 게 사업화다. 연구 성과를 논문에서 끝내는 게 아니라 기업에 이전해서 실제 사업화로 이어지는 것까지 KIST 강릉분원이 직접 관리하고 있다.
KIST 강릉분원은 3개의 연구센터와 1개의 혁신기업 협력센터로 이뤄져 있다. 이 중 혁신기업 협력센터는 기술 이전에 성과를 낸 연구자를 중심으로 기업 지원 업무만을 전담하고 있다. 강원 지역 바이오 기업의 역량을 높이는 것도 KIST 강릉분원의 역할 중 하나다. 53개 바이오 기업을 KIST 강릉분원의 패밀리 기업으로 묶어서 기술상담과 전문가 교육 등을 진행하고 있다. 기술 이전을 한 기업을 KIST 강릉분원이 있는 강릉과학산업단지에 입주시켜 근거리에서 직접 관리까지 해주고 있다.
장 분원장은 “글로벌 천연물 식품 시장이 굉장히 크다. 2033년까지 연 매출이 1000억원 이상 나는 천연물 건강기능식품 제품을 만드는 게 KIST 강릉분원의 목표”라며 “최근에 강릉이 천연물 바이오 국가산업단지 후보지로 선정됐는데, 천연물 기반의 의약품 기술을 개발하고 관련 바이오 기업을 강릉에 유치해 세계 시장에서 승부하는 게 우리의 꿈”이라고 설명했다.
KIST 강릉분원 같은 성공 사례가 더 많이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장에선 평가 방식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KIST 강릉분원에서 기업 지원 업무를 도맡고 있는 엄병헌 책임연구원은 출연연 지역 분원에 대한 평가 방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엄 책임연구원은 “NST에서 지역 조직 평가할 때 평가위원들이 ‘너 왜 논문 안 썼냐’고 한 마디만 해도 지역 분원의 연구원들은 지역 기업 만날 생각 안 하고 책상 앞에서 논문만 쓴다”며 “논문을 쓰는 연구도 중요하지만 지역 분원은 기업 현장의 수요를 좀 더 살펴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지역 조직에 대한 평가위원들부터 눈높이를 지역에 맞게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출연연 지역 분원의 무분별한 설립을 막기 위한 법안도 나왔다. 더불어민주당 이정문 의원은 작년 9월 출연연 지역 분원을 설립할 때 실시해야 하는 타당성 조사를 법으로 명문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지금은 NST 내규로만 운영하고 있어 이를 어겨도 딱히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정문 의원실 관계자는 “출연연 지역 조직이 난립하고 있어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법안을 발의한 것”이라며 “이전에 만든 지역 분원 중에서도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곳은 유예 기간을 준 뒤에 통합이나 폐쇄를 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