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최초로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린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는 1983년생이다. 나이를 따지는 한국 사회에서 1980년대생은 아직 젊은 실무진 축에 속하지만, 과학계에선 위상이 남다르다.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중반까지는 연구자의 역량과 아이디어가 빛나는 시기로 불린다.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노벨상 과학 부문 수상자들이 자신의 핵심 연구를 처음 시작한 평균 연령이 37.9세로 나타났다. 조선비즈는 한국의 기초 과학과 공학을 이끌 차세대 리더들을 독자들께 소개하는 인터뷰 시리즈를 시작한다. 젊은 과학자들은 한국공학한림원과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추천을 받아 선정했다. '제2의 허준이'를 넘어서 한국의 첫 노벨상 과학 부문 수상자, 그리고 한국 산업의 미래를 이끌어갈 핵심 인재가 이들에게서 나오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고려대 아산이학관에서 화학과 윤효재 교수가 단분자 박막을 이용한 전자소자 연구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이명원 기자

초등학생 시절, 뛰는 게 좋아 달리기 선수를 했던 한 소년이 있었다. 사춘기가 오면서 몸집이 불어나자 소년은 종목을 투포환으로 바꿔 육상선수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고향인 진주시 육상대회에 출전한 소년은 처음으로 '재능의 벽'을 마주한다. 키도 덩치도 자신과 비교가 안 되는 동료 선수들이 월등한 기록을 세우는 걸 목격한 소년은 육상의 꿈을 접는다.

다음 목표는 예술이었다.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소년은 비디오가게와 극장을 오가며 영화감독을 꿈꿨다. 학교 잡지에 영화 평론을 써서 올릴 정도로 열정이 컸다. 하지만 이번에는 '부모의 벽'이 소년을 가로막았다. 먹고 살 만한 일을 찾아서 하라는 부모의 말에 소년은 평소 성적이 좋았던 수학 쪽 재능을 살려 서강대 화학과에 진학했다.

청년이 된 소년은 대학에서 과학에 빠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미국 노스웨스턴대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은사이자 나노과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채드 머킨 교수를 만났다. 그는 머킨 교수 연구실에서 촉매 반응을 원하는 대로 제어할 수 있는 새로운 분자를 만들었는데, 이 연구 성과가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학술지인 '사이언스'에 실렸다. 당시 그의 나이가 31살이었다.

체육과 예술, 그리고 과학을 오가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윤효재 고려대 화학과 교수(44)다. 1980년생인 윤 교수는 원래 박사까지만 하고 연구를 관두려고 했다고 한다. 과학기술 연구개발(R&D) 컨설팅 전문 업체에 들어가 높은 연봉을 받으려 했지만, 머킨 교수가 그를 붙잡았다. 머킨 교수는 "연구 활동을 관두고 사기업에 들어간다면 졸업을 시켜주지 않겠다"며 가로막은 것이다.

그렇게 기업 대신 화학계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인 조지 화이트사이드 하버드대 화학과 교수 밑에서 박사 후 연구원 생활을 거친 그는 지난 2014년부터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윤 교수는 현재 분자전자학을 기반으로 한 반도체 연구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분자전자학이란 1나노미터(㎚·1㎚는10억분의 1m) 크기의 분자 1개에 일정 수준 이상의 성능을 지닌 전자기기를 구현하는 학문이다. 삼성전자와 대만의 TSMC가 2나노, 3나노 공정 수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분투하는 가운데, 그보다 먼 미래에 쓰일 첨단 기술이 윤 교수의 연구실에서 탄생하고 있다.

윤 교수는 "실리콘과 같은 무기화합물 기반인 지금의 반도체 업계를 유기화합물 기반으로 바꾸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무기화합물은 돌이나 금속처럼 유연성이 떨어지지만 외부 충격에는 강해 지금껏 반도체를 비롯한 전자기기 산업의 핵심 재료로 쓰였다. 반면 유기화합물은 외부 충격에 약한 대신 유연성이 높아 휘어지는 디스플레이와 같은 첨단 제품을 만드는 데 적합하다고 평가받는다. 윤 교수를 지난 2월 28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아산이학관 연구실에서 만났다.

고려대 아산이학관에서 화학과 윤효재 교수가 단분자 박막을 이용한 전자소자 연구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이명원 기자

-주력 연구 분야인 '분자전자학'에 대해 설명해달라.

"반도체 산업 성장이 본격화한 1970년대쯤 생겨난 분야다. 1965년 인텔 회장인 고든 무어가 반도체 회로 성능이 24개월마다 2배씩 늘어난다는 '무어의 법칙'을 내놓은 이후 사람들은 분자 크기가 1㎚이기 때문에 그보다 반도체 크기를 줄일 수는 없을 것으로 예측했다. 화학자들은 분자 1개 크기 만한 반도체를 구현할 수 있다면 집적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게 분자전자학이다. 쉽게 말하면 일정 수준 이상의 성능을 가진 전자기기를 분자 1개 만한 크기로 구현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게 분자전자학이다."

-'유기화합물'을 기반으로 한 반도체를 만드는 연구에 집중하고 있는데.

"유기화합물은 탄소 원자를 기반으로 하는 물질이다. 반대로 무기화합물은 탄소 원자가 들어있지 않은 물질이다. 현재 반도체 원천소재인 실리콘을 비롯해 산업 여러 분야에서 쓰이는 각종 금속들이 대표적인 무기화합물이다. 무기화합물은 유연성이 떨어지지만 내구성이 높아 지금껏 반도체 산업의 핵심 재료가 돼왔다. 그런데 반도체 공정이 2~3나노 수준까지 발전하면서 유기화합물이 새로운 반도체 재료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유가 뭔가.

"반도체 칩은 실리콘 웨이퍼 위에 소자를 얹고 이들을 금속 배선으로 연결해 만든 전자기기다. 그런데 금속 배선 폭을 1나노 수준까지 줄이는 건 기술적으로 어렵고 만약 실현한다 해도 유연성이 떨어져 쉽게 부러질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집적도를 높여 기기 성능을 끌어올리려면 결국 1나노까지 발전해야 하는데 무기화합물 기반으로는 그게 어렵다는 거다."

-유기화합물을 활용하면 1나노 공정도 가능하다는 건가.

"그렇다. 반도체 소자는 무기화합물로 만들되 이들을 유연성이 뛰어난 유기화합물로 연결한다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사실 이미 이런 방식을 써서 결과물이 나오고 있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를 이용해 휘고 접히는 디스플레이를 만든 게 바로 그런 사례다. 유연성이 높은 유기화합물을 써서 제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기술을 구현할 수 있게 됐다."

고려대 아산이학관에서 화학과 윤효재 교수가 단분자 박막을 이용한 전자소자 연구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이명원 기자

-유기화합물을 활용한 연구 성과를 소개해 달라.

"2019년 탄화수소로 만든 다이오드를 지방에서 뽑아낸 탄소체인으로 연결해 전기를 흘렸더니 다이오드가 문제 없이 작동하는 걸 확인했다. 배선 역할을 한 탄소체인은 폭이 0.8㎚ 수준으로 얇으면서도 유연성이 높아 무기화합물 대신 쓰기 충분했다. 탄화수소와 지방 탄소체인 모두 제작비용이 낮으면서 에너지 효율이 높아 환경 보호 차원에서도 유용하다. 이를 비롯한 여러 기술들이 연구실에서 나와 국내 반도체 대기업과 기술이전 협상도 진행됐지만 중간에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이 발생하면서 현재는 잠정 중단된 상태다."

-유망한 분야인데 막상 연구자가 많지는 않다.

"분자전자학은 물리학과 화학을 두루두루 알아야 연구가 가능한 분야다. 사실 1㎚ 크기의 세계에서 전자가 흐른다는 건 양자역학과도 관련이 있다. 여기에 유기화학, 무기화학, 전기화학 관련 지식도 필요하다. 상당히 고차원적인 종합 학문이라 건드리는 사람이 별로 없다."

-처음부터 과학자가 꿈이었나.

"꿈이 여러 번 바뀌었다. 처음에는 육상 쪽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달리기 선수를 했는데 사춘기가 오고 몸무게가 크게 불면서 투포환으로 종목을 바꿨다. 이후 고등학생 때 고향인 진주에서 열린 육상대회에 나갔는데, 당시 내 눈에는 나만 빼고 전부 최홍만 수준의 거구로 보였다. 당연히 기록에서도 크게 밀렸고 이때 재능의 차이라는 걸 크게 느껴 육상을 관뒀다. 이후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열심히 공부했는데 집안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대학생 때 화학을 전공했던 부모님을 따라 나란히 화학과에 진학했다."

-2010년에 사이언스에 제1저자로 논문을 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석·박사 통합 과정을 밟던 때다. 당시 31살이었는데 연구실에서 자유롭게 이것저것 하던 중 우연히 촉매 반응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분자를 만들게 됐다. 촉매는 원래 한 번 반응을 시작하면 다시 멈출 수 없다. 물을 부어서 촉매를 그냥 죽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매우 비효율적이다. 그런데 내가 만든 분자를 촉매와 반응시키면 촉매를 죽이지 않고도 반응을 멈출 수 있다. 반대로 분자를 다시 빼면 반응이 다시 시작된다. 스위치를 켜고 끄듯 촉매 반응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연구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가르치는 역할도 하고 있다. 반도체 인력난에 대한 의견이 궁금하다.

"반도체 쪽에 투입되는 인력 자체는 적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투입되는 인력이 오래 살아남지는 못하는 것 같다. 대학 졸업하고 대기업 신입사원으로 들어가도 금방 나가는 사람이 되게 많다. 업무 강도가 제일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근데 또 오래 버틴다고 해서 오랫동안 일할 수 있게 해주지도 않는다. 이공계 전공자들의 마지막 직업이 치킨집 사장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괜한 말이 아니다. 생태계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삼성전자와 과학기술원들이 반도체 계약학과를 만들기로 했다.

"대학이나 기업 입장에서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이런 계약학과가 공대에 많이 생기는 것에 대해 개인적인 우려는 있다. 대학이라는 건 기초 인문 소양부터 쌓아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반도체 계약학과는 반도체의 주요 공정을 가르친 뒤에 곧바로 실무에 투입할 사람을 양성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반도체에서 더 이상 할 게 없어진다면 그 인력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 지가 의문이다. 우리가 키워야 할 인재는 카멜레온 같은 사람이 아닌가 싶다. 기초가 탄탄한 인재를 키워야 반도체도 하고, 이차전지도 하고 산업의 변화에도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 정책은 빨간색 하나만 있는 사람을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중에 빨간색은 필요없고 파란색이 필요하다고 하면 이 사람은 나중에 어떻게 살아남겠나. 과학의 세계에서 중요한 업적과 발전을 이룬 사람들은 주 전공과 업적을 남긴 분야가 다른 경우가 많았다."

윤효재 고려대학교 화학과 교수는

2005년 서강대학교 화학과 학사 졸업

2010년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Northwestern University) 화학과 박사 졸업

2010년~2014년 미국 하버드대학교(Harvard University) 화학및화학생물학과 박사후연구원

2014년~현재 고려대학교 화학과 교수

2015년 국제순수·응용화학연합(IUPAC) 젊은화학자상 수상

2015년 포스코청암재단 포스코사이언스펠로십

2017년 학술연구지원사업 우수성과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표창

2020년 독일 티메 케미스트리 저널상 수상

2022년 대한화학회 무기화학분과 젊은무기화학자상

2022년~ 한국차세대과학기술한림원(Y-KAST) 회원

주요 연구 성과

Science, DOI : https://www.science.org/doi/10.1126/science.1193928

Nano Letters, DOI : https://doi.org/10.1021/acs.nanolett.8b044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