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최초로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린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는 1983년생이다. 나이를 따지는 한국 사회에서 1980년대생은 아직 젊은 실무진 축에 속하지만, 과학계에선 위상이 남다르다.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중반까지는 연구자의 역량과 아이디어가 빛나는 시기로 불린다.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노벨상 과학 부문 수상자들이 자신의 핵심 연구를 처음 시작한 평균 연령이 37.9세로 나타났다. 조선비즈는 한국의 기초 과학과 공학을 이끌 차세대 리더들을 독자들께 소개하는 인터뷰 시리즈를 시작한다. 젊은 과학자들은 한국공학한림원과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추천을 받아 선정했다. '제2의 허준이'를 넘어서 한국의 첫 노벨상 과학 부문 수상자, 그리고 한국 산업의 미래를 이끌어갈 핵심 인재가 이들에게서 나오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국가신약개발사업단은 지난해 12월 '신약개발 글로벌 트렌드 분석-유전자·세포 치료제' 보고서에서 글로벌 세포·유전자 치료제 시장의 연평균 성장률이 50%에 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줄기세포와 유전자 편집 도구를 다루는 기술 수준이 높아지면서 그간 실험실 수준에서 머무르던 세포 치료제 기술이 의료계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다른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줄기세포가 가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손상된 장기를 재생하는 것은 물론이고, 염증 반응을 조절해 감염, 면역 질환 치료에 널리 활용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완치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유전병의 정복도 가능케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지난달 14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만난 유경록 서울대 식품·동물생명공학부 교수(39)는 "세포 치료제가 앞으로 의료 패러다임을 바꿀 것"이라며 "전 세계 인류와 동물, 자연의 보건 증진에 기여할 기술"이라고 소개했다. 유 교수는 동물 질병 모델을 바탕으로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는 과학자다.
유 교수는 인간과 유전자가 95% 이상 같은 영장류를 활용해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동물 모델을 개발해 난치성 유전병 치료제 개발에 도전하고 있다. 노화로 인해 나타나는 혈액 질환이 유 교수의 주요 연구 대상이다. 그는 혈액의 노화를 연구하면서 개발한 영장류 골수 이식 플랫폼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다루지 못했던 질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고 있다. 그는 "기술은 실험실에만 존재해서는 의미가 크지 않다"며 "실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을 개발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다음은 유 교수와의 일문일답.
-연구 분야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달라.
"사람에서 나타나는 질병을 동물 모델에서 재현하는 방법과 이를 치료할 수 있는 세포 치료제를 연구하고 있다. 이미 있는 동물 모델을 이용해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과 달리 직접 동물 모델을 개발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원 헬스'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원 헬스는 무엇인가.
"인간과 동물, 자연의 건강이 모두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개념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만 보더라도 박쥐에 살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겨지면서 전 세계적인 대유행을 이끌었다. 이 과정은 이전까지 없던 자연 환경이 만들어지면서 일어난 일이다. 바꿔 말하면 인간, 동물, 자연이 조화를 이뤄야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인간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동물과 자연의 건강도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이 원 헬스의 핵심이다."
-줄기세포를 활용한 질병 연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줄기세포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있나.
"2004년 대학에 입학하던 당시만 해도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는 거의 국보급 과학자였다. 생명공학자가 돼서 황 전 교수 같은 멋진 연구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줄기세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처음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에는 중간엽줄기세포(MSC)를 주제로 연구했고,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는 조혈모줄기세포(HSC)를 연구했다."
-연구하는 세포가 중간에 바뀌었는데.
"정상적인 사람은 60~70세가 넘어가면서 혈액 세포에 돌연변이가 생긴다는 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직 어떤 돌연변이가 일어나는지에 대한 연구는 부족했다. 그래서 혈액 세포를 만드는 조혈모줄기세포를 연구하면 이를 밝히고 노화와 관련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NIH에서는 조혈모줄기세포를 이용해 혈액 세포의 노화를 연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린 영장류와 나이 든 영장류를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이가 다른 영장류에서 노화에 따라 어떤 세포가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지를 연구했다. 이 과정에서 혈액 세포에 의한 질병을 재현할 수 있는 영장류 골수이식 플랫폼 기술을 개발했다."
-영장류 골수이식 플랫폼이라고만 하면 이해가 어려운데.
"영장류의 골수에서 세포를 채취해 이를 유전자 편집으로 조작하거나 분화시키는 등 변화를 준 후에 다시 이를 이식하는 기술이다. 이 과정에서 연구에 필요한 혈액의 건강 상태를 만들 수 있다. 가령 사람에게 나타나는 급성 골수성 백혈병은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일어나는 데, 이런 질병을 가진 영장류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 골수이식 플랫폼 기술을 활용하면 보다 쉽게 유전자 변이와 질병 사이의 관계를 연구할 수 있다."
-난치병 치료제 개발에도 도움이 되는 기술인가.
"치료제를 개발하려면 비임상시험과 임상시험을 거쳐야 한다. 실제 사람에게 적용하는 임상시험 전에는 동물을 대상으로 효능과 안전성을 확인하는 비임상시험이 필요하다. 사람의 골수 세포를 쥐에 이식할 수 있지만, 쥐가 가진 생체 환경이 사람과 크게 다르기 때문에 한계가 분명하다. 반면 영장류는 인간과 유전자가 95% 이상 같고, 단백질 종류와 기능도 유사하다. 동물 모델이 없는 질병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황우석 교수 사태 이후 국내 줄기세포 연구가 어려움을 겪었다.
"실제로 정부에서 지원하는 연구비도 크게 줄었고, 어려움을 겪는 연구자들도 많았다. 지금에 와서는 전화위복이 됐다고 생각한다.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다양성이다. 전 세계 다양한 연구 그룹이 경쟁하면서 인류 보건에 증진하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다. 황 전 교수는 능력있는 연구자였지만, 한 명의 스타 과학자에게 집중하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다양한 연구자들이, 다양한 주제로 연구하는 것이 연구 생태계에는 더 큰 장점이다. 실제로 국내 줄기세포 연구 수준은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이다."
-최근에는 동물 윤리와 관련해 대체 기술 개발도 활발해지고 있다.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당연히 동물 실험 대신 대체 실험이 중요하다. 앞으로 많은 동물 실험이 대체 실험으로 대체될 것이다. 일부 동물 실험은 비윤리적이고 성과도 좋지 않다. 실제로 동물 실험에서 효능이 좋았던 치료제가 임상시험에서는 실패하는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동물 질병 모델을 연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체 실험법이 기술적으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아직 실험법이 복잡하고, 큰 비용이 들고, 재현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정교한 동물모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실험에 쓰이는 동물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인간과 동물의 건강 증진에 기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원 헬스의 개념에서 실제로 동물 실험을 통해서 동물의 건강을 지키는 연구들도 많이 이뤄지고 있다."
-학창 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나.
"학창시절에는 아주 평범했다. 부산의 변두리에서 살았고, 학군도 좋지 않았다. 그런데 나만의 장점도 분명했던 것 같다.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곧잘 했다. 주어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지 판단하고, 적절한 방식을 선택하는 방법도 잘 찾았다. 심지어 부모님이 해외에 나를 혼자 지내게 할 정도였다. 실제 대학에 입학할 때도 이런 부분을 좋게 평가 받았다. NIH에서 근무할 때도 미국 젊은 혈액자로 선발돼서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기회도 받았다.
-한국인이 미국 혈액학자 멘토링 프로그램에 선발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닐텐데.
"미국인 대상이 아니고 미국에서 연구하는 혈액학자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었던 덕이다. 미국이 과학자 양성에 얼마나 오픈마인드를 갖고, 큰 지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를 포함해 미국 혈액학자 10명, 유럽 혈액학자 10명이 모여 1년 동안 4번 미팅을 하고 2주 동안 합숙하는 등 교육프로그램이 진행됐다. NIH에서 혈액학 연구를 처음 시작한 만큼 이때 큰 도움을 받았다. 창의성 덕분에 좋은 과학자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창의성이 과학자에게 중요한 자질이라는 것인가.
"나는 수시 입학 제도를 통해서 2004년 서울대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수시 입시에 대해 시스템이 미흡한 시기라 면접 자리에서 교수와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런데 지금 교수가 돼서 면접에 들어가보면 문제를 주고 짧은 시간에 풀어내는 능력을 테스트한다. 어떻게 보면 객관적이고 공정해 보이지만, 창의성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대학원에서는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풀어내야 하는데, 이 때는 창의성이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최근에는 우수한 학생들의 의대 편중 현상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생명과학 분야에서는 학생들이 졸업하고 일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가 상대적으로 가장 적은 게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성공한 바이오 기업이 많아져야 우수한 학생들이 생명과학을 전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산업계와 관련된 기술도 연구하고 있나.
"일부 기업에 자문이나 공동연구를 하고 있다. 영장류 골수 이식 플랫폼을 바탕으로 세포 치료제 연구를 하고 있다. 가령 특정한 물질과 세포를 섞어 만드는 융복합치료제라는게 있다. 조혈모세포를 이식 받은 후에 면역 세포가 자신의 세포를 공격하는 이식편대숙주질환이 일어나는 데, 대식세포와 나노 산화그래핀을 섞어 치료제를 개발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연구실에서 개발한 기술을 실용화하는 것에 관심이 많아 앞으로는 벤처 창업도 해 볼 계획이다."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제들이 최근 상용화되고 있다.
"줄기세포 치료제가 4~5개 상용화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매출은 아직 높지 않다고 알고 있다. 줄기세포 치료제는 손상된 신체를 복원하는 재생의료의 영역에 속한다. 치료제 가격은 비싸지만, 환자의 생명과는 연관성이 낮은 것이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효능을 높여 가격만큼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돼야 한다."
-최근 정부차원에서 바이오 산업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있다.
"규제 개선이 필요하다. 국내는 규제가 강한 편이어서 업체가 자신들의 기술력을 증명하기 어렵다. 좋은 기술을 개발해도 효능 검증 자체가 쉽지 않아 글로벌 기업과 협업이 어렵다. 인프라에 대한 지원도 필요하다. 줄기세포 치료제를 개발하려면 업체가 우수 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 기준(GMP)에 맞는 시설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스타트업이나 소규모 업체는 이를 직접 갖추기 어렵다. 최근에는 정부가 GMP 시설을 만들고 업체가 활용할 수 있게 하자는 얘기도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유경록 서울대 식품·동물생명공학부 교수는
1985년생
2007년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 학사
2013년 서울대 수의학과 박사
2013~2014년 서울대 수의학과 박사 후 연구원
2014~2018년 미국 국립보건원(NIH) 박사 후 연구원
2018~2020년 카톨릭대 의생명과학과 조교수
2020년~현재 서울대 식품·동물생명공학부 조교수, 부교수
2021년 2022 한국차세대과학기술한림원 회원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