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의대는 수술이나 임상은 잘 하지만 연구 분야에서는 선진국 수준이 아닙니다. 의료체계는 잘 갖춰져 있지만 의과학의 학문 수준을 따져보면 세계 최고 수준과는 거리가 멉니다.”
유욱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은 ‘대한민국 1호 의과학자’로 불린다. 서울대 식물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에서 생화학분자생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부터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분자생물학과 의과학 분야를 한국에 자리잡게 한 일등공신이다. 작년부터 과학 분야의 최고 석학들의 모임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을 이끌고 있다.
지난 9일 경기도 성남 분당의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 만난 유 원장은 전 세계에서 불고 있는 바이오 혁신을 한국이 이끌기 위해서는 연구에 집중하는 의사과학자(Physician Scientist·MD-PhD)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의사과학자는 의사면허를 소지한 연구 전문가다. 국내에서는 의대를 졸업한 뒤에 대부분이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의사가 되지만, 해외에서는 의사면허를 취득하고 연구자가 되거나 바이오 기업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글로벌 바이오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인 모더나를 창업한 로버트 랭거 미국 메사추세츠공대(MIT) 석좌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의사과학자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유 원장은 기존 의대에 맡겨놓기 보다는 KAIST나 포스텍(포항공대) 같은 연구중심대학을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KAIST는 기존 의공학대학원을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으로 전환하는 계획을 세웠고, 포스텍은 연구중심 의대와 병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KAIST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 설립에 힘을 실어주면서 관련 논의가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유 원장은 “과거에는 생명과학과 의학은 완전히 다른 학문이었는데 5년 정도 전부터 의과학이 공학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며 “카이스트나 포스텍에서 연구에 집중하는 의사과학자를 빡세게 육성해서 세계 톱을 노려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유 원장과의 일문일답.
-KAIST가 추진하는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이 화제다.
“한국의 의대 연구 수준은 선진국과 거리가 멀다. 진료나 임상 같은 분야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위암 수술을 누가 잘 하는지를 보면 한국 1등이나 미국 1등이나 별 차이가 없다. 임상 경험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로 가면 달라진다. 위암 연구를 누가 잘 하느냐를 보면 차이가 있다. 의대의 연구 수준, 학문적인 수준에서는 세계 톱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 차이를 좁히려면 KAIST나 포스텍에서 제대로 의사과학자를 육성해서 교육시켜야 한다. 병원에서 임상을 함께 하는 의사들은 세계 톱 저널에 실리는 논문을 쓸 시간이 없다. KAIST 같은 연구중심대학에서 365일 연구에만 매진해야 가능한 일이다.”
-챗GPT가 등장하면서 AI가 화제지만, 과학계에선 바이오 분야의 혁신에 대한 기대가 크다.
“과거 30년 간 생명과학과 의학은 완전히 다른 학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두 학문이 완전히 퓨전(결합)이 됐다. 한 5년 정도 전부터는 의과학이 공학과 결합이 됐다. 아직은 초기 단계지만 점점 속도가 빨라질 것이다. 기존의 의대는 이런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기 쉽지 않다. 연구중심 의대는 정부가 결정할 문제지만, 의대 선진화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과학기술에 대한 기대가 남다르다.
“과학인으로서 여러 대통령을 겪었지만 윤 대통령은 과학에 대한 이해가 남다르다. 한국이 발전하려면 과학 분야가 앞서나가야 한다는 걸 대통령 본인이 깊이 이해하고 있다. 전 세계 과학기술계에서 한국의 실력을 인정받고 있고, 국내에서도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들의 호감도 크다. 과학 발달의 모멘텀을 잘 탔다고 본다.”
-정책적인 지원이나 제도 개선이 필요한 부분은 없을까.
“과학기술이 계속 나아가야 하는데 사람이 없는 게 문제다. 저출산과 고령화 때문에 연구인력이 계속 줄고 있다. 한림원 차원에서도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고 있다. 몇 가지 포인트가 있는데, 우선 일선의 여성 연구자 비율을 늘려야 한다. 과학계 종사자 가운데 여성 비율이 18% 정도라고 하는데, 다른 선진국은 30% 정도는 된다. 여성 연구자를 더 많이 활용해야 한다. 외국인력 유치도 중요하다. 동남아시아나 중동, 아프리카 지역의 우수 인재에게 장학금을 줘서 한국에서 연구자로 육성해야 한다. 벌써 지방대학은 대학원생의 30~40% 정도는 외국인이다. 사실 미국만 봐도 연구실의 연구자 대부분이 외국인인 셈이다.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한다.”
-다른 해결책은?
“개인적으로 고령 과학자를 활용해야 한다고 본다. 이공계 연구자 가운데 정년이 돼서 은퇴하는 사람들 중에 15~20% 정도는 해당 분야에서 톱 레벨의 연구자다. 은퇴하는 65세 정교수가 이제 갓 교수가 된 신임 조교수보다 실력이 뛰어난 경우가 많다. 정말 아까운 인력인데 은퇴한다고 활용을 못 하는 거다. 실력이 뛰어난 은퇴 연구자는 정년을 늘려서 일하게 해주는 제도가 필요하다. 연구재단이나 정부도 고민해야 한다. 정년이 가까워지면 연구자가 프로젝트를 딸 수가 없다. 곧 정년이 되는 연구자에게는 프로젝트를 안 맡기는 거다. 연구자들의 연령대별 퍼포먼스 그래프를 보면 57세 이후 급락하는 걸 볼 수 있다. 65세 이상 고령 연구자들에게도 프로젝트를 맡기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과기한림원은 올해 9월 ‘노벨프라이즈 다이얼로그 서울 2023′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한국을 찾아 직접 대중과 소통하는 행사다. 2014년에 노벨화학상을 받은 슈테판 헬(Stefan Hell ) 독일 막스플랑크 생물물리화학연구소장, 2013년에 노벨화학상을 받은 마이클 레빗(Michael Levitt) 스탠퍼드대 교수가 연사로 거론된다.
-노벨프라이즈 다이얼로그를 준비하고 있다. 어떤 행사인가.
“한림원의 사명과도 연결되는 사업이다. 국민들에게 과학적인 마인드를 심어주기 위한 행사다. 노벨상 수상자 5명이 대중을 상대로 20분씩 강연을 하게 된다. 최근에 노벨상을 받은 연구자를 데려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도 이제 과학 분야 노벨상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10년 안에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정확히 예견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수준까지 간 것은 맞다. 다만 노벨상 수상자를 내려면 과학 외교가 중요하다. 노벨상 수상자가 10명이라고 치면 그 중 누구나가 인정하는, 이견이 없는 건 3명 정도다. 나머지 7명은 후보군과 큰 차이가 없지만 노벨상을 받는 셈이다. 노벨상 후보군이 50명이라면 이 후보군과 수상자를 결정하는 차이가 바로 과학외교다. 일본이 이 과학외교를 잘하면서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했다.”
-노벨상 수상자 배출을 위해 또 필요한 노력이 있다면.
“박사후연구원이 PI(연구책임자)급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야 노벨상에 도전하는 초일류 연구실이 나온다. 노벨상 수상자의 연구실을 보면 주력 부대가 대학원생이 아니라 박사후연구원들이다. 한국의 연구실은 대학원생이 주력 부대인데 사실 이러면 제대로 된 노벨상급 연구는 하기가 힘들다. 박사후연구원이 교수가 되지 않고 연구실에 남게 하려면 확실한 인센티브와 포상이 필요하다. 충분한 월급을 줄 수 있도록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등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일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최소한 국내 톱 레벨의 대학 10곳에서 최고 수준의 연구자가 있는 연구실은 주력 부대가 박사후연구원이 돼야 한다.”
-’과학자의 뇌를 자유롭게 하자’는 캐치프라이즈도 내세웠다.
“우리나라에서 노벨상급 연구를 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결과를 빨리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다. 모든 연구개발이 국가 발전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연구자들이 압박감에 시달렸다. 개인적으로 총 연구개발비의 10% 정도는 기한을 정하지 않고 논문 같은 결과물 제출도 하지 않아도 되게끔 해야 한다고 본다.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발상할 수 있도록 하자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