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의 시작은 언제나 현대 인류의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중국과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로 대표되는 문명의 발상지를 기준으로 했다. 기록이나 구전(口傳)과 같은 전통적 사료를 이용해 왕조와 인종, 국가 중심으로 인류의 시간을 바라봤다. 지구를 구성하는 한 생명체으로서 인류를 보기보다 특정 지배세력이나 민족을 중심으로 역사 인식이 발전한 결과다.
데이비드 크리스천(David Christian) 호주 매쿼리대 역사학과 교수는 인간 종의 역사를 전통적인 '문명'이 아닌 '과학'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크리스천 교수가 직접 고안한 '빅 히스토리'라는 개념이다. TED(18분 이내 강연을 제공하는 미국 비영리재단)에 올라온 그의 강연은 2011년 '꼭 봐야 하는 11가지 강의'에 선정되기도 했다.
빅 히스토리는 언뜻 단순한 단어들의 조합 같지만, 천문학·유전학·지질학과 같은 복잡한 과학적 방법론이 사용된다. 탄소 연대 측정법과 방사성 연대 측정법, 우주배경복사와 같은 기술로 수만 년에 그쳤던 역사는 138억 년으로 늘어났다.
크리스천 교수는 빅뱅부터 시작해 태양계 형성, 호모사피엔스의 등장, 근대혁명까지 총 8개로 구성된 길고 험난한 138억 년의 역사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망했다. 빅뱅이 원소를 만들고, 태양계와 생명이 출현한다. 지구에 나타난 인류는 농경시대를 거쳐 근대혁명을 거쳤고, 이제는 지구의 기후를 뒤바꿔놓고 있다. 우주와 지구 생명의 이야기 통해 인류에 대한 이해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과학적 방법론을 채택한 역사는 인류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앞으로 인류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크리스천 교수는 지난해말 신시아 브라운 박사, 크레이그 벤저민 박사와 함께 쓴 '빅 히스토리'(원제: Big History: Between Nothing and Everything)라는 역사책을 국내에 냈다. 조선비즈는 크리스천 교수가 그리고 있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듣기 위해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빅 히스토리의 개념에 대해 설명해달라.
"빅 히스토리는 가능한 가장 큰 규모, 우주적 규모로 과거를 이해하려는 시도다. 지구와 우주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과 인류, 사회의 역사를 연구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빅 히스토리에서는 우주론과 지질학, 생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다룬다. 이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지식들이 서로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연결 고리를 알 수 있다.
빅 히스토리는 인간이 어떻게 지구라는 행성의 변화에 영향을 받고, 영향력을 갖는지 보여준다. 오늘날 글로벌을 이해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현재 인류가 직면한 갑작스러운 변화들은 하나같이 전 세계적인 협력을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해졌는데, 빅 히스토리는 우리가 '세계 시민'으로 거듭나도록 도와준다."
-빅 히스토리를 고안하게 된 계기가 있나.
"1989년 호주 매쿼리대에서 지금의 '빅 히스토리'에 해당하는 내용을 처음 강의했다. 이후 세계사학회지에서 이 개념을 설명하는 기고문을 요청해 '빅 히스토리'라는 표현을 고안하게 됐다. 이 표현이 기존 역사의 확장판임을 암시하는 동시에 은밀하게 풍기는 오만함도 좋았다. 특히 빅 히스토리의 오만함이 많은 사람을 매료시킬 것으로 봤다.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별의 연구부터 고대인의 DNA까지, 우주론과 생물학 같은 분야의 증거도 역사 연구에 두루 활용하는 점이 좋았다."
빅 히스토리에 다양한 과학 분야의 증거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크로노미터 혁명' 덕분이다. 빅 히스토리를 연구하기 위해선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지구 생명과 우주 기원으로 이어지는 사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크로노미터 혁명은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이전의 과거를 측정할 수 있는 다양한 연대측정법과 우주 관측의 개발을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방사성 연대 측정법은 방사성물질이 일정한 속도로 붕괴해 하위 물질을 형성하는 원리를 이용한다. 우라늄 같은 방사성물질이 섞인 물질 덩어리에서 납 같은 하위 물질이 얼마나 많이 생성되는지 측정하면 그 물질이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있다. 이 같은 원리로 '탄소-14 연대 측정법'이 1950년대부터 처음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크리스천 교수는 크로노미터 혁명으로 대표되는 과학적 증거를 통해 인류 역사를 총 '8개 문턱'으로 나눴다. 8개 문턱은 '빅뱅-별의 기원-원소 탄생-태양계 출현-지구 생명 출현-호모사피엔스 출현-농경 시작-근대혁명'으로 이어진다. 모두 전 단계에 없었던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다고 여겨지는 지점이다.
-인류 역사의 문턱을 총 8개로 나눴다.
"문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건 2005년쯤이었다. 빅 히스토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복잡한 이야기를 탐색하는 데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과학적 개념보다는 교육학적 개념에 가까운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중간 도시국가 형성과 같은 '작은 문턱'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아무거나 문턱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마치 새로운 문을 열고 가는 것처럼 이전에는 없었던 심오한 변화가 갑자기 일어나는 지점이 분명 존재한다. 문턱은 진화가 점진적으로뿐만 아니라 갑작스럽게 일어날 수 있다는 미국 생물학자 스티븐 굴드와 리처드 르원틴의 '단속 평형론'에 영향을 받았다.
-여덟 번째 문턱인 근대 혁명은 현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시기이기도 한데, 앞선 문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술한 분량이 적다.
"역사를 다루다 보면 나무를 보다가 숲을 못 보는 경우가 흔하다. 빅 히스토리는 숲을 보는 관점으로 지금의 세계를 조금 다르게 이해한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우리 종(인간)이 갑작스럽게 지구상 수많은 생물권의 운명을 중재하는 존재가 됐다는 사실이다. 아직 이 사안에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이유는, 아직 인류 대다수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전문가들조차 인류가 생물권 전체를 관리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시급한 사안이다. 빅 히스토리는 변화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크리스천 교수가 빅 히스토리를 설명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보편성'이다. 그동안 특수한 국가와 민족 단위로 나눠보던 것에서 벗어나, 다양한 지식을 결합해 우주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도 빅 히스토리에 과감히 투자하며 온라인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빅 히스토리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그가 보편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이유는 인류가 직면한 위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이 기술 패권을 놓고 대립하고, 기후 변화가 전 세계를 덮친다. 근미래인 100년 후에는 인류가 사용해온 화석연료는 점점 고갈되고 다른 행성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앞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국제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크리스천 교수가 제안한 인류를 하나로 묶을 원동력은 바로 과학이었다.
-빅 히스토리는 인류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가.
"시간의 규모를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다르게 보인다. 10~20년 정도는 정치적 변화를 설명할 수 있지만, 수백 년 규모로는 사람들이 삶을 꾸려나가는 방식을 세밀하게 볼 수 있다. 인류가 지구의 우점종이 된 이후로 현재는 커다란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이 문제들은 개별 국가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다. 지구 전역에서 협력해야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일한 인류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다.
큰 규모로 인류 역사를 바라보면 인류가 급격한 속도로 지구 전체의 미래를 형성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약 10만 년 전에도 인간은 고유한 창의성과 능력으로 주변 환경을 바꿨고,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에는 농경을 통해 전 세계의 환경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화석연료의 사용은 우리 종을 변화시킨 혁신의 물결을 가속화 했다. 더불어 땅과 바다, 대기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혁명 이후는 지질학적으로 '인류세'이기도 하다. 지난 40억 년 동안 어느 종도 이렇게 강력했거나 생물권 전체의 운명을 지배한 적은 없었다. 우리는 인간과 지구가 상호 작용해온 역사의 놀라운 전환점을 지나고 있다. 앞으로 벌어질 중대한 변화가 우리 종의 의식적인 결정과 행동에 달려 있다는 의미로, 지구는 '의식을 지닌' 행성이 됐다. 과거를 충분히 큰 규모로 바라보지 않으면 인류가 직면한 거대한 도전을 이해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빌 게이츠도 빅 히스토리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알고 있다.
"빌 게이츠는 빅 히스토리 대중화에 엄청나게 이바지했다. 그는 빅 히스토리가 다양한 형태의 지식을 연결하고, 직면한 세계적인 도전을 이해하기 위해 폭넓은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준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빅 히스토리 무료 온라인 커리큘럼을 구축하는 데 아낌없이 지원했다. 이 프로젝트로 빅 히스토리를 가르치고 배우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수천 곳의 학교에서 빅 히스토리 프로젝트 자료를 활용하고 있다."
-과학을 통한 보편적인 가치가 중요하지만,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이나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진행되는 것도 사실이다.
"탈세계화라는 물결과 지역 간 경쟁 심화 등 위협이 산재한 세상에 살고 있다. 엄연한 현실이다. 하지만 이면에는 재난 구호, 코로나19 팬데믹 해결을 위한 국제 협력과 같은 희망적인 신호도 제법 보인다. 지속가능하고 협력적인 국제적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과정은 느리고 불규칙하다. 그러나 모든 정부가 기후 변화, 전염성 방지, 생물 다양성 보호와 같은 중요한 전 지구적 문제에 대해 상호 협력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국면으로 나아갈 것이다. 100년 전만 해도 한 나라의 미래는 그 나라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는 게 통념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앞으로도 과학기술의 발전은 역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까.
"물론 그렇다. 학계에서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간극은 끔찍할 정도로 서로의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 인문학은 인간 존재를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류 역사 전체와 인간종의 진화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인류학과 고고학, 고생물학, 진화생물학, 환경과학에서도 다양한 통찰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과학을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연결 고리를 이해하고 서로 다른 영역의 지식을 통합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