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는 인류가 자연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지질시대를 말한다. 다만 인류세에 대한 기준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최근 인류세워킹그룹은 인류세의 기준을 정할 투표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블룸버그

인간의 활동을 통해 지구 환경을 바꿔 놓은 시대를 뜻하는 ‘인류세’(人類世)가 공식적으로 지질시대에 편입될 것으로 보인다.

17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34명의 각국 전문가들로 구성된 인류세워킹그룹(AWG)은 이날 인류세의 시작점 등 세부 내용을 정하기 위한 내부 투표 단계에 돌입했다. AWG이 인류세의 정의, 시작점 등 세부적인 사항을 결정하면 그간 여러 기준이 제시된 인류세가 조만간 공식적으로 도입될 전망이다.

인류가 지구 환경을 크게 바꿔놓은 지질시대를 의미하는 인류세는 그간 지질학자들의 여러 의견이 통일되지 못해 공식적으로 인정 받는 개념은 아니었다. 인류세의 개념을 정하고,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데는 동의했지만, 무엇을 기준으로 정할지에 대해서는 저마다 다른 의견을 제시해 왔다. 인류세의 시작 시기를 정할 기준으로는 산업화, 핵무기 개발, 식습관 등 저마다 다른 기준을 주장하고 있다.

어느 지역을 중심으로 인류세를 정할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올해 말까지 인류세워킹그룹은 올해 말까지 투표를 통해 인류세의 기준이 될 지역을 결정할 예정이다. 후보는 전 세계 퇴적층 9곳이다. 이번 투표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인류세의 세부적인 정의를 결정하는 만큼, 이번 투표 결과에 과학계가 관심을 두고 지켜보고 있다.

◇핵무기, 화석연료, 아니면 닭 뼈, 인류세의 기준이 될 물질

1946년 미국은 태평양 중서부 비키니 섬에서 핵실험을 시작했다. 지질학자들은 이 사건이 인류가 자연에 강력한 영향을 줄 수 있는 도구를 얻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인류세를 연구해온 워킹그룹은 2019년 인류세의 시작점을 1950년대로 정하는 것을 합의했다. 인구 수가 폭발적으로 성장해 25억명을 달성했고, 그에 따라 인류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도 커진 시기다. 하지만 정확한 시기를 결정하기 위한 기준 물질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다.

지질학자들은 그간 인류세의 시작점을 정할 대표 물질을 찾아왔다. 인류가 환경에 미친 영향을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있어야 하고, 양의 변화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조건으로 정해진 후보물질은 핵무기 개발로 만들어진 방사성 원소, 산업화로 인해 늘어난 화석 연료의 흔적, 닭 뼈 등 다양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1950년대 인구 증가와 함께 늘었다는 것이다.

인류세 근거 가운데 이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물질은 방사성 원소다. 1940년대 이후 핵무기 실험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인류가 자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를 만들었다는 점을 대부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얀 잘라시에비치 AWG 의장은 “방사성 원소가 주는 신호가 가장 강력하다”고 평가했다. 스위스 취리히대 연구팀은 탄소-14, 플루토늄-239 등 다양한 방사성 동위원소가 축적된 지층을 연구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산업화의 시작을 알린 화석 연료의 사용 흔적을 분석하고 있다. 특히 화석 연료를 태울 때 나오는 미세 먼지가 온실가스, 방사성 원소 등 다른 물질과 같은 패턴으로 변하는지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특히 화석연료는 지구온난화와 같은 기후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질학자들은 산업화는 1700년대 시작됐지만, 본격적으로 화석 연료의 사용이 늘어난 시기를 1900년대 중반 이후로 보고 있다.

인류의 식습관을 볼 수 있는 닭 뼈도 인류세의 시작점을 정하는 후보 물질 중 하나다. 2018년 영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공동연구팀은 “닭 뼈를 인류세의 기준으로 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농경사회로 시작한 인류는 대규모 농장과 공장식 목장을 운영하며 육식의 비중을 크게 늘려 왔다. 하지만 가축을 기르는 데 많은 목초지가 사라지고, 이산화탄소나 메탄 같은 온실가스의 배출도 크게 늘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목축업으로 배출되는 온실가스는 전체의 7%를 차지하고 있다.

이외에도 아메바에 축적된 농업 용수의 흔적을 찾거나, 곤충이 먹은 미세플라스틱을 분석해 인류세의 지표 물질을 찾으려는 연구들이 이뤄지고 있다.

◇인류세를 대표할 지형 9곳, 올해 투표로 최종 1곳 선정

남극에서 채취한 빙하 퇴적물은 인류세를 결정할 지질층 후보 중 하나다. 남극에서 내린 눈에 의해 쌓인 공기중 물질이 빙하 퇴적층에 쌓여 있다. /리즈 토마스

어떤 물질을 기준으로 인류세를 정할지 중요한 만큼, 기준이 될 장소를 결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구 환경의 변화를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기준 물질도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춘 지역을 ‘황금 스파이크’라고 부른다.

인류세워킹그룹은 올해 안으로 전 세계의 9개 후보 중 최종 황금 스파이크를 어느 곳으로 정할지 투표할 예정이다. 2019년 12곳이었던 후보지 중 최종 후보에 오른 9곳이다.

9곳의 후보 중 캐나다 온타리오에 있는 크로포드 호수는 크기에 비해 유난히 깊은 수심으로 가장 주목 받고 있다. 깊이로 인해 퇴적물을 흩어지게 하는 벌레나 물살의 영향을 덜 받아 약 1000년 간의 퇴적물이 쌓여 있는 곳이다. 특히 주변 지역에서는 750년 전부터 원주민들이 농사를 꾸준히 지어와 농업과 관련된 퇴적물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일본 규슈섬에 있는 벳푸만의 해양퇴적물에서는 바닷물에 녹은 산소량이 적어지며 해양 생태계가 교란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바닷물의 산소량이 적어지는 이유로는 지구온난화와 해수 산성화, 부영양화 등이 꼽힌다. 모두 인류가 환경에 미친 중요한 영향이다.

남극에서 채취한 얼음 퇴적층도 인류세를 정할 후보 중 하나다. 남극에서는 눈이 내리며 공기 중의 여러 물질이 퇴적물로 쌓인다. 특히 남극은 계절에 따라 주기적으로 눈이 내리는 만큼 다른 지층보다 연도에 따른 구분이 쉬운 편이다. 리즈 토마스 영국 케임브리지대 남극조사단 연구원은 “남극 얼음 퇴적층에서 먼지와 방사성 원소, 더 나아가서 온도 변화까지 알 수 있다”며 “다만 20세기 중반의 실제 변화량이 이곳에 그대로 담겨 있는지는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호주 바다의 산호초 지대, 발트해의 고틀란드 분지,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시어스빌 호수, 중국 길림성의 시하일롱완 호수, 폴란드의 이탄습지, 멕시코만의 산호초 지대까지 포함해 9곳이다.

◇인류가 자연을 바꾸기 시작한 시기, 인류세

워킹그룹의 투표 결과는 내년 봄 경 공개될 예정이다. 투표 결과에 따라 인류세에 대한 권고안을 만들고 지질학 위원회 3곳에 제출해 최종적으로 공식화 여부를 결정한다. 위원회에서 60%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인류세는 지질시대 중 하나로 인정된다.

모든 내부 투표가 마무리되는 내년 봄께 워킹그룹은 지질학 위원회 3곳에 권고안을 제출해 인류세를 공식화할지 판단을 받게 된다. 각 위원회 60% 이상의 승인을 얻으면 인류세는 지질시대 중 하나로 인정된다. 찬성표를 얻지 못하면 다시 후보를 압축해 재투표를 진행한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수년간은 공식적인 지질 역사로 등재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과학자들이 인류세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인류가 탄생하고 수백만년 동안 자연의 일부로 지냈다면, 인류세를 계기로 인간이 자연을 바꿀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잘라시에비치 의장은 “인류세워킹그룹이 하는 일은 인간이 지구의 지질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라며 “우리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인류가 지구에 미친 영향을 보다 근본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