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유성구 한국형 중이온가속기연구소 '라온(RAON)' 전경. /기초과학연구원 제공

“중이온가속기는 현대 기초 과학의 토대입니다. 중이온가속기를 활용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만 30명이 넘습니다. 그런 중요한 시설을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들기 위해 지난 10년간 노력한 게 곧 결실을 맺습니다.”

권면 기초과학연구원(IBS)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장은 이달 15일 대전 유성구에 짓고 있는 한국형 중이온가속기연구소 ‘라온(RAON)’을 방문한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라온은 ‘희귀동위원소가속복합시설(Rare isotope Accelerator complex ONline experiment)’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단어다.

권 단장은 “올해 안에 라온이 완공되면 몇 차례 시험운전을 거친 후 내년 중순부터 라온 사용을 희망하는 기업, 기관들에게 사용 신청을 받을 예정”이라며 “2024년 초에는 라온의 첫 ‘희귀동위원소’가 나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IBS는 이날 중이온가속기의 핵심 설비를 공개했다.

대전 유성구 중이온가속기연구소 '라온(RAON)' 내부에 설치된 가속 모듈들. /최정석 기자

◇세상에 없는 물질을 만들어라…한국형 중이온가속기 곧 가동

현재 세상에 존재하는 원소는 1번 수소(H)에서 118번 오가네손(Og)까지 총 118개다. 지금까지 발견된 각 원소의 동위원소(중성자 수가 다른 원소) 수를 더하면 3000개가 넘는다. 일례로 수소는 중성자 수에 따라 수소, 중수소, 삼중수소로 나뉘는데 여기서 중수소와 삼중수소가 수소의 동위원소에 해당한다.

동위원소 중에서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자연상태에 존재하지 않아 인공적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을 ‘희귀동위원소’라 한다. IBS에 따르면 인류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희귀동위원소는 1만개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희귀동위원소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장치가 중이온가속기다. 원자를 이온화한 다음 가속기에 넣고 빠르게 이동시켜 표적 원자에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새로운 원소를 만들어낸다. 중이온가속기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가벼운 이온을 무거운 원소에 충돌시키는 희귀동위원소 생성장치(ISOL) 방식, 무거운 이온을 가벼운 원소에 충돌시키는 비행파쇄동위원소분리장치(IF) 방식이다.

라온은 두 방법을 함께 쓰는 세계 최초의 ‘융합형 중이온가속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2011년부터 지금까지 총 1조5000억원을 들여 구축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17년 시작한 라온 건설은 올해 안에 끝날 예정이다. 라온이 설치된 연구소는 약 2만3500평(7만7636㎡)으로 축구장 11개 넓이와 비슷한 수준이다.

대전 유성구 중이온가속기연구소 '라온(RAON)' 연구소에 설치된 중앙제어장치. /최정석 기자


◇길이 550m 가속기동부터 영하 269도 극저온 설비까지

눈 앞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중이온가속기 전체 설비를 통제하는 중앙제어센터다. 55인치 크기 모니터 30개를 이어붙여 만든 거대한 화면에 중이온가속기 시설 운영 현황이 회색과 초록색으로 표시돼 있었다. 현재 라온은 시험 운전만 진행 중이었기에 초록색 불이 들어온 시설은 많지 않았다. 라온을 구성하는 100여개 세부 설비들 중 이날 가동 중인 건 10개 남짓이었다.

화면 앞으로 긴 책상 세 줄이 둥글게 배치돼있는 모습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미션 컨트롤 센터를 보는 듯했다. 정연세 IBS 시스템통합부장은 “시운전 단계에서는 이곳에 약 20명의 인원이 교대근무하며 상황을 확인한다”며 “정식 운전이 시작되면 5명 정도만 상주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이온가속기 시설은 중앙제어센터가 있는 곳과 다른 건물에 있었다. 중앙제어센터 건물에서 버스를 타고 약 3분간 이동하자 최대 길이 550m에 달하는 ‘가속기동’이 나타났다.

가속기동에서 처음 볼 수 있는 설비는 ‘극저온 설비동’이다. 희귀동위원소의 탄생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3~4m 높이의 커다란 흰색 탱크 주변을 은색 파이프가 에워싸고 있었다. IBS에 따르면 이곳은 기체헬륨을 액체헬륨으로 바꾸는 일종의 공장 시설이다.

이온화된 원소를 가속기에 넣으려면 가속기 온도를 영하 269도까지 낮춰야 한다. 그래야만 원소 형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극저온 설비동에서 액체헬륨을 만들어 가속기를 냉각시키는 데 쓰는 것이다.

대전 유성구 중이온가속기연구소 '라온(RAON)' 내부에 설치된 입사기. 이 장치가 이온화된 원소를 가속 장치 내부로 발사해준다. /최정석 기자

극저온 설비동을 지나면 가속관에 고주파 전력을 공급하는 시설이 나타난다. 직육면체 형태의 회색 기계장치 수백대가 100m를 넘는 긴 공간 양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습은 통신사 데이터 센터와 닮아 있었다.

이 기계장치가 만들어낸 고주파 전력이 중이온가속기의 본체라 할 수 있는 ‘가속장치’로 향한다. 가속장치는 총 102개의 가속 모듈로 구성돼있는데 일부는 음전하(-), 다른 일부는 양전하(+)를 띠도록 설정돼있다.

이 상태에서 양전하를 띤 이온화된 원소가 가속장치에 들어오면 원소 앞에서는 음전하가 당기는 힘, 원소 뒤에서는 양전하가 미는 힘이 작용한다. 원소가 가속장치 내부를 고속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가속장치에 이온화된 원소를 넣어주는 역할은 ‘입사기’가 맡는다. 구리색 원통형 모양의 입사기가 가속장치를 향해 빛의 속도로 원소를 발사한다. 가속장치는 이 속도를 더 끌어올리기 위해 실시간으로 전기장을 바꾸며 원소를 뒤에서 밀고 앞에서 당긴다. 때문에 원소 속도는 점점 빨라지게 된다. 이 원소가 표적 원소와 충돌하면서 희귀동위원소가 탄생하는 것이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강입자충돌기(LHC)에 있는 검출기 중 하나인 CMS 검출기. 이 곳에서 힉스 입자가 최초로 발견됐다.

중이온가속기에서 만든 희귀동위원소는 생명의 근원을 파악하고 질병 치료 원리를 규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일례로 지난 2009년 아다 요나트를 비롯한 3명의 과학자는 중이온가속기를 이용해 리보솜의 3차원 구조를 규명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리보솜은 아미노산 연결을 통한 단백질 합성을 담당하는 몸속 세포 기관이다.

우주 연구에도 중이온가속기를 활용할 수 있다. 지난 2013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는 거대강입자가속기(LHC)를 사용해 ‘힉스 입자’를 발견했다. 덕분에 힉스 입자의 존재를 1964년에 처음 제시한 영국 물리학자 피터 힉스는 50년 만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힉스 입자는 빅뱅 직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입자에 질량을 부여한 존재로 현대 물리학이 우주를 설명하는 데 있어 핵심적 역할을 맡고 있다.

권 단장은 “라온을 통해 한국에서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새 원소를 찾아내는 것이 목표”라며 “새로 발견할 원소 이름은 ‘코리아늄’으로 이미 정해놨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