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유성 한국과학기술원(KAIST) 본원 정문 전경. /KAIST 제공

기획재정부가 4대 과학기술원(KAIST·GIST·UNIST·DGIST) 예산 재원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교육부로 이관하려는 것과 관련해 과학계 우려가 커지고 있다.

4대 과기원은 과학기술 특성화 인재 육성과 동시에 과학기술 연구 수행을 위해 설립된 공공기관으로 일반 대학과 달리 별도 법률에 근거해 과기정통부 산하 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현재 네 과학기술원 예산은 각 과기원마다 특별법에 따라 과기정통부 예산에 속해있다.

하지만 과기원 예산이 교육부 밑으로 들어가면 향후 과기원이 교육부 규제를 받으면서 연구 자율성과 기술개발 수준이 떨어질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기재부는 예산 편재가 교육부로 바뀌어도 예산 편성에 대한 모든 권리는 과기정통부에게 있다고 하지만 과학계 일각에선 “내 자식 키우는데 쓸 육아비를 옆집에서 받는 꼴”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11일 과학계에 따르면 과기정통부는 과기원 예산을 교육부로 편입시키는 방안에 대한 연구 현장의 우려를 약 두 달간 기재부 측에 계속 전달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과기원은 고등교육보다 연구개발(R&D)이 주된 목적인 기관으로 일반 대학과 성격이 다르다”며 “일반 대학과 과기원 예산을 교육부가 전부 쥐는 것은 과기원 설립 취지에 어긋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 9월 초 이태규 국민의힘 의원(비례대표)을 포함한 의원 14명은 ‘고등·평생교육지원특별회계법안’을 발의했다. 학령인구 감소와 재정여건 악화에 대응하기 위해 유·초·중등 교육에 배정한 예산 중 일부와 타 부처 사업 예산을 교육부 측 ‘특별회계’로 묶어 대학 지원, 직업 교육 등에 활용하는 게 법안 골자다

법안이 통과되면 과기정통부가 과기원 연구운영비 지원용으로 편성한 예산도 교육부 특별회계로 넘어간다. 과기정통부에 따르면 내년도 과기원 예산은 5252억원이다. 이에 더해 내년도 교육부 예산 중 유·초·중등 지방교육재정교부금 일부와 고등교육 및 평생·직업교육 부분 예산 등 총 16조8000억원 가량이 이듬해 특별회계로 편성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4대 과기원을 비롯한 전국 4년제 대학 지원 예산이 모두 교육부 특별회계에서 나온다. 기재부 관계자는 “과기정통부가 과기원에 배정하는 예산보다 교육부 특별회계 규모가 훨씬 크기 때문에 평소보다 100억~200억원 정도 예산을 더 받을 수도 있다”며 “더 좋아지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하지만 자칫 과기원이 예산을 따내기 위해 전국 4년제 대학과 경쟁하는 구조로 전락할 가능성도 커진다.

과학계가 가장 크게 불만을 드러내는 게 이 부분이다. 연구개발 주무 부처인 과기정통부가 4대 과기원 예산을 기존대로 편성한다면 예산 배정과 증액 등에서 이견에 따른 갈등이 상대적으로 작겠지만 교육부 예산에 편입되면 4대 과기원과 전국 대학이 예산을 놓고 불필요한 경쟁을 벌이는 상황이 생긴다는 것이다. 특히 교육부는 연구개발을 1개 과에서 다룰 정도로 전문성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과기정통부가 편성권이 있다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예산을 주는 교육부 입김이 강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자율성을 침해할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이창옥 KAIST 수리과학과 교수(KAIST 교수협의회장)는 “한정된 예산을 전국 4년제 대학교들과 나눠야 하는 제로섬 상황이 오면 과기원의 연구개발 과정, 성과와 무관한 진흙탕싸움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과기원이 얼마의 예산을 받든 일반 대학 사이에서 ‘과기원 특혜 논란’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가장 큰 문제는 수준높은 연구개발의 핵심 요소인 ‘자율성’이 침해받는 것”이라며 “과기정통부는 과기원과 연구개발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독창적인 연구에도 충분한 예산을 배정했는데, 일반 4년제 대학교들의 견제 속에서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법 개정이 국내 연구개발 경쟁력 수준에도 악영향을 끼칠 거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향후 4대 과기원이 과기정통부가 아닌 교육부 규제를 적용받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기재부는 해명자료를 통해 “4대 과기원은 법에 따라 과기정통부 장관 관리감독을 받기 때문에 예산이 교육부로 편성된다 해도 교육부 통제를 받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기재부는 “법이 통과돼 예산이 교육부에 편성된다 해도 과기원은 과기정통부 소관기관이기 때문에 예산 편성·집행은 현행 절차와 동일하게 진행된다”며 “교육부로 예산승인권이 넘어간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고 밝혔다.

하지만 과학계는 예산을 가진 교육부가 관리만하는 과기정통부를 대신에 과기원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KAIST 관계자는 “기재부는 예산 편성이 과기정통부에서 교육부로 넘어가는 것 외엔 달라질 게 없을 거라 하는데, 그럴 거면 왜 법을 고치겠나”며 “장기적으로 과기원 통제권을 교육부 산하에 두기 위한 계획의 첫 단추인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고 말했다.

4대 과기원이 집단으로 항의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GIST 관계자는 “모든 과기원이 불만을 품고 있지만 어쨌든 과기원도 정부 산하 기관”이라며 “정부로부터 예산을 받아야 하는 위치이기 때문에 공개적인 불만을 내세우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번 법안이 교육부가 기존에 내세운 방향성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지난 9월 “대학을 (교육부의) 산하기관 취급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며 “교육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육 주체들에게 최대한의 자율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기원 예산을 교육부 산하에 두려는 움직임과 반대되는 모습이다.

이 장관은 지난 3월 ‘대학혁신을 위한 정부개혁방안’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윤석열 대통령 인수위원회에 전달하기도 했다. 이 보고서에는 교육부 고등교육정책실을 폐지하고 대학정책, 학사제도에 대한 규제 기능을 국무총리실 산하 기관으로 보내는 내용이 담겼다. 특히 국내 4년제 대학 경쟁력이 상실한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교육부가 연구개발(R&D) 경쟁력을 유지해온 과기원의 예산을 관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그간 상황과 맞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기정통부는 기재부와 교육부의 정책 추진에 미온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12일 해명자료를 내고 “과기원의 의사에 반해 4대 과기원 예산을 신설 추진 중인 고등‧평생교육 특별회계로 이관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입장을 내놨다.

과기정통부는 “과기원 예산의 회계 이관을 검토하는 것에 대해, 과기원의 독립성을 존중하고 설립취지가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하에 기재부와 적극 협의하고 있다”며 “과기원 기획처장단과의 회의 등을 통해 과기원 의견을 신속하게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기재부 등과 지속적으로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