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병호 서울대 교수. 이 교수는 세계 3D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이었다./조선일보DB

이병호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전 서울대 공대 학장)가 7일 오전 58세 나이로 별세했다.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 교수는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30세이던 1994년부터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에서 교수로 일해왔다.

이 교수는 엔지니어인 부친이 사다준 일본 과학만화와 전파과학사에서 발간한 과학 번역서를 읽으며 연구자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현대 문명의 진보를 가져온 광학과 디스플레이 기술을 선도하는 원천 연구에 평생을 바쳐왔다. 빛을 탐구하고 제어하는 첨단 광학 기술과 소재를 발굴해 사람 눈에 가장 친숙한 꿈의 디스플레이를 구현할 방법을 탐구했다.

이 교수는 일찌감치 광통신용 광섬유, 양자 전자소자와 함께 입체TV를 구현할 3차원 동영상 디스플레이 연구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냈다. 특히 특별한 장치를 이용하지 않고도 입체 영상을 구현하는 플라즈모닉 광학 분야에서 기반을 다져왔다. 이 교수는 세계 최초로 안경 없이 보는 3차원(3D) 디스플레이의 원천기술을 개발하며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 교수는 2007년 당시 노벨상급의 창의적 연구과제를 지원하는 창의연구단 사업에 선정돼 전자와 광파가 함께 진동하는 소자인 플라즈몬을 이용해 광정보를 제어하는 플라즈모닉 광학 연구를 수행했다. 이 연구성과는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아 광학 분야의 국제 학술지 ‘어플라이드 옵틱스’와 ‘옵틱스 익스프레스’에 잇따라 표지논문으로 실렸다.

이 교수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사람 눈에 가장 자연스러운 디스플레이였다. 실제로 그가 발표한 연구 성과는 대부분은 ‘눈에 피로와 어지러움을 줄이기 위한 기술’로 그려졌다. 안경을 쓰지 않고 보는 입체 디스플레이와 홀로그래피 기술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것도 같은 이유다.

이 교수는 최근까지도 빛의 굴절률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메타표면’과 이를 응용하는 소자 연구에 주력해 왔다. 이 분야는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시대를 가속할 안경형 기기의 필수 기술로 꼽히고 있다.

이 교수는 2002년 40세 미만 과학자의 최고상인 ‘젊은 과학자상’을 받은 데 이어 2005년에는 41세의 젊은 나이에 미국 광학회의 석학회원이 됐다. 그는 미국광학회 디지털 홀로그래피 및 입체영상 학술회의 의장으로 3년간 활동했다. 지난 2013년에는 전기·전자·컴퓨터·통신 분야에서 가장 권위적인 최대 규모 학회인 국제전기전자공학회(IEEE) 석학회원(펠로우)으로 선정됐다.

IEEE 최고 등급 회원인 펠로우는 10년 이상 연구 경력이 있는 시니어 멤버 중 개인 연구 성과와 기술성취 실적, 전문 분야 경력 등 7개 기준을 충족해야 선정된다. 그는 국제광공학회(SPIE), 국제광학회(OSA), 국제정보디스플레이학회(SID) 석학회원으로도 추대됐는데 이들 4개 학술단체 석학회원에 추대된 한국 공학자는 그가 처음이다.

이 교수는 평소 자유로운 연구실 분위기 속에서도 후학들에게 연구자로서 책임감을 강조한 학자로 통했다. 그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좋은 성과가 나온다”고 말했다.그는 “자신이 쓴 논문이 세계의 과학자들에게 꼬박꼬박 인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자부심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좋은 논문을 쓰겠다는 다짐도 하게 한다”며 주기적으로 논문을 인용한 횟수를 조사해 연구원들을 격려했다.

이병호 서울대 교수가 2013년 자신의 연구실에서 투명한 유리창에 입체 영상이 뜨는 ‘시스루(see-through)’ 디스플레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그는 세계 3D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이다./조선일보DB

이 교수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공학과 공대의 혁신도 고민했다. 그는 공대가 새로운 시대와 사회, 산업에 부응하는 새로운 교육을 시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생들의 사고방식이 변했고 흥미도 바뀌었는데 교수들이 자신들이 배웠을 때 생각만 해선 안 된다며 학생 눈높이에 맞춘 교육, 자발적 동기를 갖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9월 서울대 공대 학장에 취임한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서울대 공대와 사회가 소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며 “서울대 공대가 연구와 인력 양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공대라는 사실을 국민에게 각인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에는 혁신 교육에 써달라며 사재 1억 5000만 원을 서울대 공대교육연구재단과 전자전기정보장학재단에 기부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공대 학장에 취임한 직후 뇌종양이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수술 후 병세가 호전돼 주위 만류에도 다시 업무에 복귀해 강도 높게 일을 했다고 공학계 관계자들이 전했다. 하지만 최근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면서 빛나는 연구 업적을 뒤로 한 채 생을 마감했다.

빈소는 7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9일 오전 9시, 장지는 서울추모공원이다. 연락처 (02)2072-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