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털을 가진 회색늑대가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눈밭에 서있다. 유럽보다 북미, 캐나다보다 남쪽 멕시코 쪽에 검은 털을 가진 회색늑대가 많다./미 국립공원관리청

검은색은 세상이 생겨나기 전 암흑을 의미했다. 구약성서는 빛과 함께 세상이 생겨나기 전 짙은 어둠만이 있었다고 했고, 그리스 신화도 어둠 속에 검은 새 닉스만 존재했다고 설명했다. 세상의 끝도 검은색이다. 요한계시록은 종말과 함께 검은 동물을 언급했으며, 드라큘라도 늘 검은색 박쥐들과 함께 묘사됐다. 에드가 앨런 포는 1843년 단편 ‘검은 고양이’에서 검은색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심을 극대화했다.

하지만 검은색은 색깔일 뿐, 사람에게 저주를 내리지도 종말을 가져오지도 않는다. 자연에서는 오히려 생명을 구한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팀 쿨슨 교수 연구진은 지난 21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북미대륙에 사는 늑대가 검은 털 덕분에 전염병을 이겨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홍역 창궐하는 남쪽일수록 검은 늑대 많아

북미대륙과 유럽에 사는 회색늑대(학명 Canis lupus)는 개의 직계조상이다. 이름과 달리 털이 검거나 흰 늑대도 있다. 그런데 같은 회색늑대지만 북미대륙에는 유럽보다 검은 털이 더 많이 나타났다. 또 북미에서도 북쪽 캐나다보다 멕시코 쪽으로 내려갈수록 검은 늑대가 많아졌다.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리의 회색늑대 무리. 회색 털과 검은색 털이 반반 정도 있다. 유럽의 회색늑대는 검은 털을 가진 개체가 드물다. 과학자들은 북미로 처음 이주한 사람들이 데려온 개가 검은 털 유전자 변이를 북미 회색늑대에게 전달했다고 추정한다./미 국립공원관리청

쿨슨 교수 연구진은 회색늑대의 털 색깔이 질병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앞서 연구진은 2011년 CBD103이라는 유전자 변이가 검은 털을 만든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후 같은 유전자 변이가 회색늑대를 위협하는 호흡기 질환인 개홍역바이러스 감염증을 이겨내는 데 관여한다고 추정했다. 이 유전자가 자리잡은 DNA에서 포유류의 폐 감염을 막는 단백질도 만들기 때문이다.

개홍역바이러스에 개과(科) 동물에게 치명적인 전염병이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어린 늑대는 절반이 죽으며, 성체도 겨우 살아남아도 눈이 멀거나 평생 발작에 시달린다.

연구진은 북미대륙의 회색늑대 12 무리 1100여 마리를 대상으로 검은 털색과 개홍역바이러스에 대한 항체 사이의 관연성을 조사했다. 항체는 특정 병원체가 침입하면 바로 결합해 무력화시키는 면역단백질이다. 만약 늑대가 개홍역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갖고 있다면 그전에 감염됐다가 이겨냈다는 의미다.

예상대로 개홍역바이러스 항체를 가진 늑대는 털이 검은 경우가 많았다. 또 개홍역바이러스가 창궐한 지역일수록 검은색 늑대가 많았다. 이 바이러스는 북미대륙의 남쪽에서 많이 퍼졌다. 캐나다보다 멕시코 쪽 늑대가 더 검은 이유가 밝혀진 것이다.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리에서 회색 털을 가진 회색늑대가 검은색 늑대를 쫓아다니고 있다. 회색늑대에서 검은 털을 만드는 유전자 변이는 홍역도 이겨내도록 한다./미 국립공원관리청

개가 늑대에게 병 이겨낼 검은 털 유전자 전달

쿨슨 교수는 과거에도 그랬는지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20년 이상 회색늑대를 관찰한 기록을 살폈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은 1995년부터 미국에서 사라진 회색늑대를 복원했다. 연구진은 검은 털이 병에 강하다면 짝짓기에서 선호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유전자는 쌍으로 이뤄져 있다. 쿨슨 교수 연구진은 앞서 검은 털을 만드는 돌연변이가 유전자 한쪽에만 있는 검은 늑대가 양쪽 모두 변이가 있는 검은 털 늑대나 둘 다 없는 회색 털 늑대보다 생존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유전자 한쪽만 검은 털을 만드는 변이를 가지려면 서로 다른 털색끼리 짝짓기를 해야 한다.

연구진은 짝짓기에서 다른 털색끼리 만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컴퓨터로 가상실험(시뮬레이션)을 진행했다. 그 결과는 20년 이상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관찰한 자료와 일치했다. 개홍역바이러스가 창궐한 지역일수록 털 색이 다른 늑대끼리 짝짓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바이러스가 나타나지 않은 곳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사실 회색늑대가 검은 털을 갖게 된 것은 개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1만년~1만5000년 전 쯤 개에게 검은 털 유전자 변이가 확립됐다고 본다. 이 유전자 변이가 개의 면역체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인간이 아시아에서 북미대륙으로 이주했다.

과학자들은 회색늑대가 인간과 함께 북미대륙으로 온 개와 짝짓기를 하면서 수천 년 전 검은 털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본다. 회색늑대 집단에 퍼진 개홍역바이러스 역시 개에서 유래했다. 인간이 회색늑대를 길들여 개를 만들었고, 이 개가 다시 회색늑대에게 병도 주고 약도 준 셈이다.

참고자료

DOI: www.science.org/doi/10.1126/science.abi8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