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8년 10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한 미술품 경매에서 당시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이 벌어졌다. 인공지능(AI)이 그린 초상화가 43만2000달러(약 6억원)에 낙찰된 것이다.
작품을 내놓은 곳은 프랑스 예술품 업체 ‘오비어스 아트’. 이들은 14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 나온 초상화 1만5000장을 심층학습(딥러닝)시켜 개발한 인공지능(AI)으로 초상화를 그렸다. 당시 경매를 진행한 경매회사 관계자는 “AI가 앞으로 예술계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 말했다.
그 예상은 4년 뒤 현실이 됐다. 지난달 26일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열린 미술 박람회에서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이란 제목의 그림이 디지털아트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작가 이름은 ‘미드저니를 사용한 제이슨 앨런(Jason M. Allen via Midjourney)’이었다. 미드저니는 사용자가 입력한 명령어에 맞춰 그림을 그려주는 AI 프로그램이다.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은 앨런이 직접 손으로 그린 게 아니라, AI가 앨런이 입력한 명령어에 맞춰 대신 그려준 그림이었던 것이다. 앨런과 AI의 합작품이 우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곧바로 ‘부정행위 아니냐’는 지적이 일었다. 이에 앨런은 “작품을 낼 때 미드저니를 썼다고 밝혔으니 문제 없다”며 “AI가 인간을 이긴 것”이라며 맞섰다.
끝내 콜로라도 주정부까지 나서 상황을 진정시켰다. 올가 로백 콜로라도 주정부 대변인은 “디지털아트 부문 규칙에 따르면 디지털 기술을 창작 과정에 사용할 수 있다”라며 “심사위원들은 앨런의 작품이 AI가 그린 줄 몰랐지만, 이를 알았다 해도 앨런이 우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앨런은 1등 상금으로 300달러(한화 약 42만원)를 받았다.
◇ ‘AI 화가’에게서 가능성을 본 NASA 엔지니어
미드저니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 엔지니어 출신인 데이비드 홀츠가 개발한 ‘AI 화가’ 프로그램이다. 2012년까지 NASA에서 일했던 그는 자기 삶과 아무 상관도 없는 물건들을 개발하는 데 싫증을 느껴 일터를 옮겼다. 이후 손동작을 인식해 컴퓨터 명령어를 입력하는 기술 등을 개발하던 중, 미드저니를 만들기 위해 2021년 새로 회사를 차렸다.
홀츠는 한 외신과 인터뷰에서 미드저니를 개발한 이유에 대해 “2021년 전후로 AI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 그리고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큰 폭으로 발전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1~2년 안에 30프레임에 달하는 고화질 이미지를 초 단위로 만들어내는 것까지 가능할 것”이라며 “가격이 비싸겠지만 분명 실현 가능한 기술이다”라고 말했다. 사용자가 원하는 이미지를 빠르게 만드는 AI 기술에 시장성이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 미드저니, 30초 만에 그림 4개씩 그려내
미드저니는 딥러닝 AI에 수억에서 수십억개에 달하는 인터넷 이미지를 학습시켜 만든 프로그램이다. 단순히 키워드에 맞는 이미지를 찾아주는 게 아니라, 키워드에 해당하는 이미지들을 AI가 뒤섞은 다음 새로운 이미지를 그려내는 식으로 작동한다.
지난 7월 미드저니는 온라인 메신저 프로그램 ‘디스코드’를 서버를 통해 오픈 베타 서비스를 시작했다. 채팅창에 명령어 ‘/imagine(상상하다)’과 함께 자신이 원하는 그림 키워드를 입력하면 30초쯤 되는 시간 만에 그림 4개를 그려준다. 그림 4개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구도가 비슷한 그림을 더 만들거나 품질을 높일 수도 있다.
◇ 빠르게 원하는 그림 얻기에는 아쉬운 성능
그러나 아직 사용자의 요구를 정확히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명령어를 통해 ‘고대 로마’의 모습을 그려 달라고 한 뒤 30분에 걸쳐 그림 구도를 바꾸거나 품질을 높여봤지만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콜로세움과 성 베드로 대성당 등 고대 로마를 상징하는 건축물들은 사진을 오려 붙인 듯 어색한 모습이었다. 나무와 같은 주변 사물들은 형태가 뭉개져 있었다.
무료 사용자에게 제공되는 명령 횟수 25번을 전부 썼지만 끝내 마음에 드는 그림은 얻지 못했다. 직접 사용해본 미드저니는 ‘복불복’이 강한 프로그램이었다. 원하는 그림을 요청한다기보다는, AI가 만들어낸 결과물들 중 자신이 생각한 것이 그나마 가장 잘 반영된 그림을 고르는 것에 가까웠다.
돈을 내고 미드저니에 명령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받으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원하는 그림을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미드저니 무료체험이 끝난 사용자들은 10달러(한화 약 1만4100원)를 내고 명령 횟수 200번을 더 받을 수 있다.
다만 이렇게 되면 미드저니의 최대 장점인 ‘속도’가 사실상 사라진다. 그림 하나하나를 만들어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인간보다 훨씬 적겠지만, 원하는 그림을 얻으려다 보면 인간이 그리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앨런은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을 만드는 데 약 80시간을 투자했다고 한다.
◇ “AI 화가, 인간 대체는 아직 멀었다”
미드저니가 서비스를 시작하고 전 세계 소셜미디어(SNS)와 커뮤니티 사이트에 미드저니의 작품이 올라왔다. 사람들은 AI가 매우 높은 수준까지 발전했다며, 향후 예술 및 상업 미술 업계에서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다만 업계 종사자들은 미드저니와 같은 AI 화가가 인간을 따라잡기엔 멀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AI의 ‘소통 능력’이 인간보다 훨씬 떨어진다는 점을 핵심 원인으로 짚었다.
한 네이버 인기웹툰의 채색 업무를 전담하고 있는 A씨는 “업계에서는 단순히 잘 그린 그림보다 고객의 세부적인 요구 사항을 완벽히 반영한 그림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라며 “고객과 소통하고 요구 사항을 이해하는 능력이 그림 실력만큼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국내 게임회사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B씨는 “아직 상업용으로 쓸 수 있을 정도 수준은 아니라는 게 대다수 업계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이다”라며 “멋진 그림들을 뽑아낼 수는 있겠지만 그게 정말 고객이 원하는 결과물이냐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고 말했다.
◇ 기술뿐만 아니라 법적 문제 해결해야
미드저니가 상업적으로 원활하게 쓰이려면 기술뿐 아니라 저작권과 같은 법적인 문제도 해결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행법에 저작물은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 저작자는 ‘저작물을 창작한 자’로 정의돼있다. 미드저니와 같은 프로그램을 구매해서 쓴다 해도, 그림을 만든 주체가 AI라면 저작권을 인정받을 수 없다.
지난 2월에는 AI 알고리즘인 ‘크리에이티브 머신’이 만들어낸 사진에 대해 스티븐 테일러 박사가 저작권을 신청했으나 미국 저작권청이 거부 판결을 내렸다. 인간이 만든 저작물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작품에 대한 저작권은 그 작품을 저작권자가 독점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한다. 홀츠가 전망한 것처럼 몇 초 만에 고화질 이미지는 30장씩 그려낼 정도까지 AI가 발전해도, 이를 활용해 만든 작품이 저작권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상업적으로 쓰이긴 어려울 수 있다.
다만 최근 AI가 그림, 음악 등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어내면서 기존 저작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2020년 12월 주호영 국민의힘 의원을 포함한 11명이 AI의 저작물이란 개념을 명시한 ‘저작권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심사 단계에 머물러 있다. 소관위인 문화체육관광위원회가 사람이 AI가 만든 창작물에 관여했다면 누구를 저작자로 둘 것인지 등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영국, 아일랜드, 뉴질랜드 등 해외 국가들은 이미 법적으로 AI가 만든 창작물의 저작권을 인정하고 있다. 해당 창작물을 만들기 위해 AI를 직접 다룬 사람 또한 저작자로 규정하고 있다.
손승우 한국지식재산연구원장(중앙대 산업보안학과 교수)은 “AI가 만든 창작물이 하나의 시장을 이루는 때가 머지 않았는데, 이를 보호할 법은 전혀 없는 상태”라며 “AI 창작물을 보호할 별도의 법을 만들어 불법 복제 및 도용 행위를 처벌할 근거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