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일본에서 곰의 공격을 받고 숨지거나 다친 사람이 역대 최다 기록을 세웠다. 기후변화로 너도밤나무 같은 먹잇감이 감소하면서 곰이 민가까지 내려오는 사례가 잦아졌기 때문이다. 인간이 초래한 온난화가 곰의 공격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탈리아는 사정이 다르다. 같은 기후변화 위기에 있지만 아펜니노 산맥에 사는 곰들은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드물다. 일찍이 인간에 의해 멸종 위기로 내몰리자 살아남기 위해 공격성을 줄이는 유전적 변화로 갈등 소지를 없앤 것이다. 북극에 사는 곰은 살아남기 위해 육식 대신 초식으로 유전자를 바꿨다. 인간이 곰들의 유전자에 무슨 일을 한 것일까.
◇2000년 전부터 고립되면서 공격성 감소
이탈리아 페라라대 생명과학 및 생명공학과 연구진은 "마을 근처에서 사는 이탈리아 곰들이 지난 2000년 넘는 시간 동안 유전자 변화로 몸집이 작아지고 덜 공격적으로 변해 인간과 갈등을 최소화했다"고 15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분자생물학과 진화'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아펜니노 불곰(학명 Ursus arctos marsicanus)의 유전자를 유럽의 다른 불곰과 비교했다. 앞서 연구에 따르면 아펜니노 불곰은 2000~3000년 전 다른 유럽 불곰에서 갈라져, 로마 시대 이후 완전히 고립된 상태를 유지했다.
이탈리아 불곰이 고립된 것은 인간 탓이다. 논문 교신 저자인 안드레아 베나초(Andrea Benazzo) 교수는 "아펜니노 불곰의 개체수 감소와 고립은 아마도 이탈리아 중부에서 농업이 퍼지면서 산림 개간이 늘고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밝혔다.
연구진은 멸종 위기에 처한 곰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유전자 차원에서 분석했다. 예상대로 고립된 아펜니노 불곰은 다른 유럽 불곰보다 유전자 다양성이 감소하고 근친교배율이 높았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오히려 곰의 생존에 도움을 줬다. 연구진은 아펜니노 불곰의 진화 과정에서 공격성 감소와 연관된 유전자가 선택됐다고 밝혔다.
곰을 위험에 빠뜨린 것도, 지금까지 살 수 있게 한 것도 인간이었다. 인간이 서식지를 침범하면서 불곰 개체수가 감소하고 유전적 다양성도 줄어 멸종 위험을 높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곰에서 공격성이 감소하는 유전자 변이가 나타났다. 덕분에 인간과 갈등이 줄어 고립된 상태나마 생존할 수 있었던 셈이다.
논문 공동 저자인 조르지오 베르토렐레(Giorgio Bertorelle) 교수는 "인간과의 상호작용은 대부분 야생동물의 생존에 위험하지만, 갈등을 줄이는 특성의 진화도 촉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이 점에서 개체수 복원 과정에서 이런 유전자 변이가 희석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개체수를 늘리려고 곰을 자연에 방사하다가 다시 공격성이 커져 인간과 갈등을 유발하는 결과를 초래하면 안 된다는 의미다.
◇물개 사냥 힘들자 초식으로 바꾼 북극곰
그린란드에 사는 북극곰(Ursus maritimus)도 인간 탓에 유전자가 바뀌었다.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대(UEA) 생명과학과의 시몬 임러(Simone Immler) 교수와 앨리스 고든(Alice Godden) 박사 연구진은 "그린란드 남동부에 사는 북극곰들이 온난화에 적응하기 위해 유전자 변이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난 12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모바일 DNA'에 발표했다.
북극곰은 지상에서 가장 큰 육식 동물로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다. 그러나 급격한 기후 변화로 해빙(海氷)이 빠르게 줄어들면서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 북극곰은 바다를 떠다니는 얼음 조각인 해빙 위에서 물개가 숨 쉬려고 떠오르는 순간을 포착해 사냥한다. 하지만 기후 변화로 인해 해빙이 빠르게 줄어들면서 사냥 기회가 급격히 감소했다. 고든 박사는 "지금 상태가 지속되면 2050년까지 북극곰의 3분의 2 이상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앞서 미국 워싱턴대 과학자들은 그린란드 남동부에 고립된 북극곰 집단을 발견해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이들은 해빙 의존도가 다른 곳보다 낮았다. 그린란드 남동부는 북동부보다 기온이 더 올라 해빙이 적다. 이스트 앵글리아대 연구진은 그린란드 북동부와 남동부에 사는 북극곰들의 혈액을 채취해 유전자를 비교했다.
남동부에 사는 북극곰은 생존을 위해 북동부와 다른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해빙이 사라지면서 물개 사냥이 힘들게 되자 지방 처리와 연관된 유전자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연구진은 북극곰들이 점차 육식 대신 식물성 식단에 적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북극곰의 유전자 변화가 지난 200년 사이에 일어났다고 밝혔다. 이런 급격한 유전자 변이는 이른바 '도약 유전자(jumping gene)' 덕분에 가능했다. 말 그대로 뛰어다니듯 DNA에서 위치를 단기간에 쉽게 바꾸는 유전자다.
바버라 맥클린톡 박사는 옥수수에서 도약 유전자를 처음 발견해 198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노란 옥수수에서 옥의 티처럼 군데군데 검붉은 알이 박혀 있는 것이 바로 도약 유전자 때문이다.
곰들은 인간의 위협에 맞서 스스로 유전자를 바꿔 살길을 찾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스트 앵글리아대 연구진은 "이번 연구는 북극곰에 희망을 주지만 멸종 위험이 줄었다는 뜻은 아니다"며 "탄소 배출을 줄이고 온난화 속도를 늦추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해야 한다"고 밝혔다.
참고 자료
Molecular Biology and Evolution(2025), DOI: https://doi.org/10.1093/molbev/msaf292
Mobile DNA(2025). DOI: https://doi.org/10.1186/s13100-025-00387-4
Sicence(2022),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bk27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