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고양이가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에 감염돼 폐사하는 사례가 잇따라 보고됐다. 이달에만 서울의 동물보호소 두 곳에서 고양이의 고병원성 AI 확진 사례가 발생했다. 국내에서 AI로 고양이가 집단 폐사한 것은 처음이며 세계적으로도 두 번째다.
미국과 프랑스, 폴란드 등 해외에서도 올해 들어 고양이 AI감염 사례가 잇따라 보고되고 있다. 고양이처럼 인간 사회 가까이에 살고 있는 포유류가 AI에 감염되는 사례가 늘면서 인간에게도 감염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방역당국 “국내서 고양이 AI 감염 사례 2건 보고...추가 실태 조사 중”
1일 방역당국에 따르면 지난 25일 용산구의 한 동물보호소에서 폐사한 고양이 두 마리가 고병원성 AI(H5N1형) 확진 판정을 받았고, 31일에도 관악구 소재 동물보호소에서 기르던 한 마리가 ‘양성’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지난 25일 발생한 용산구 보호소 고양이 AI 감염 사례의 경우 검사를 통해 확진된 것은 두 마리지만, 같은 기간 총 38마리가 폐사한 것으로 알려져 ‘집단 감염’이 의심되는 상황이다.
관악구 사례 역시 호흡기 증상으로 동물병원을 찾은 한 마리만 검사해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외 감염 동물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용산구와 관악구의 고양이들 모두 유기묘로 야생에서 생활하던 중 야생조류 또는 분변 등과 접촉해 전염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방역당국은 확진 사례가 추가로 보고되자 방역 조치를 강화해 서울시 전역의 길고양이에 대해 AI 감염실태를 조사한다는 방침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의심 사례 신고를 받은 뒤 질병관리청, 지방자치단체 등에 관련 내용을 알렸다.
국내에서 검출된 AI H5N1형은 1996년 중국에서 첫 출현한 바이러스다. 조류인플루엔자는 2020년 이후 변종 형태로 퍼져나가고 있다. H5N1의 하위 유형인 클레이드 2·3·4·4·b 바이러스 변종은 아프리카, 아시아 및 유럽 국가에서 야생 조류와 가금류에서 전례 없는 수의 사망을 초래했다. 2021년에는 북미로, 2022년에는 중남미로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다.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고양이에게서 조류인플루엔자 감염 사례가 잇따라 보고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프랑스도 오리 농장 근처에 사던 고양이에게서 AI 바이러스가 발견됐다. 수의사에게 발견될 당시 고양이는 경미한 고열을 보이다 상태가 악화돼 호흡곤란 증상이 나타났다. 이후 안락사가 이뤄졌다. 폴란드 13개 지역에서도 고양이가 AI에 감염된 사례가 45건 보고되기도 했다. 폴란드 방역 당국도 고양이 감염 경로를 파악 중이다.
최근 미국 질병통제센터(CDC)에서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신종감염병(Emerging Infectious Disease)’에 발표된 ‘2022년 프랑스에서 발견된 고양이 AI 감염 사례’ 연구를 보면, 조류인플루엔자 H5N1 계통 1과 계통 2·2는 2004년 이후 고양이에게서 산발적으로 발견됐다.
연구팀은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와 인간의 긴밀한 상호작용과 근접성, 새에서 포유류로 한 번을 통과한 돌연변이 바이러스가 포유동물을 숙주 삼아 빠른 선택으로 인간에게 침투해 감염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면서 “이는 상당한 공중 보건 위협을 나타낸다”고 밝혔다.
최근 고양이를 포함한 포유류 AI 감염 사례는 잇따르고 있다.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 H5N1의 하위계통인 2·3·4·4b에 감염된 포유류 사례는 지난 2021~2022년 급증한 것으로 관찰됐다. 2022년 이후 전 세계 10여개국에서 H5N1의 하위계통 바이러스에 감염된 포유류 발병이 보고됐다. 현재 보고된 사례 외 발병 사례 국가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 밍크, 유럽 오소리, 스컹크, 미국 바다표범, 페루와 칠레의 바다사자, 아시아 흑곰, 칠레 돌고래 등 육지와 바다 포유류 모두 영향을 받았으며 최소 26종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레고리오 토레스 세계동물보건기구(WOAH) 소속 박사는 “최근 조류인플루엔자의 생태계와 역학에 패러다임에 변화가 생기면서 새로운 질병이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면서 “바이러스가 야생 조류의 죽음을 초래하는 데 이어 포유류까지 감염시키면서 전 세계적인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양이를 통해 사람에게 전파 가능성도... 전문가 “국내 발견 바이러스 치사율 10% 수준”
일각에선 고양이를 통해 사람으로 AI가 전파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AI는 급성 호흡기 감염병 중 하나로 사람을 포함한 다양한 종의 포유류에도 감염될 수 있는 인수공통전염병이다.
H5N1 바이러스는 1996년 처음 중국 광둥성 거위와 오리 농장에서 발견됐다. 이듬해인 1997년 홍콩에서 조류 인플루엔자 H5N1 바이러스에 의한 인체감염 사망자가 최초로 보고된 이후, 매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인체 감염 환자가 보고되고 있다.
하지만 2003년 말부터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각국의 가금류에서 유행하던 AI는 지역간, 종간 장벽을 뛰어넘어 계속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간과 가까운 포유류의 잇따른 AI 감염과 관련해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경계심을 갖고 보고 있다. WHO는 현재 사람 간 전파가 이뤄질 가능성은 낮지만, 신종 바이러스 변이가 발생한다면 인간 감염도 가능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WHO 공식 발표로는 이 같은 바이러스로 인해 미국, 영국, 미국, 에콰도르, 스페인 등 나라에서 12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그중 4명이 중증이었고 나머지 8명은 무증상이거나 경증으로 회복이 됐다.
실비 브라이언드 WHO 글로벌 감염 대응국장은 “지금까지 조사한 정보로 파악해볼 때 바이러스는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쉽게 전염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를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바이러스가 진화하는지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WHO는 유엔식량농업기구(FAO), WOAH, 실험실 네트워크와 긴밀히 협력해 이러한 바이러스의 진화를 모니터링하고 인간에게 더 위험할 수 있는 변화의 신호를 찾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 식품의약국(FDA)도 최근 잇따라 발생한 폴란드 고양이 감염 사례를 들며, “고양이 주인과 수의사를 포함해 고양이와 접촉하는 사람들이 AI에 감염될 위험도가 ‘낮음’과 ‘낮음에서 중간 정도’라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국내에서 유행 중인 바이러스의 인체 치명률은 높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같은 H5N1형 중에서도 아종으로 분류, 중국에서 1명이 사망해 치명률은 10% 수준으로 보고 있다. 30~50%를 넘는 고병원성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낮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송대섭 서울대 수의대 교수는 “현재 국내에서 발견된 바이러스는 2020년부터 전 세계적인 우세종으로 자리 잡은 2·3·4·4·b 클레이드로 감염된 사람이 전 세계에서 10명 정도이고 치명률은 10% 이하”라며 “30% 이상 치명률을 보였던 바이러스는 같은 H5N1형 내에서도 2·3·2·1·a 혹은 2·3·2·1·c 계통”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송 교수는 “치명률이 10%가 적다고 볼 수는 없고 안심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지난 2월 캄보디아에서는 H5N1 바이러스에 감염된 11세 소녀가 숨진 사례가 나왔다. 당국이 이 소녀와 접촉한 12명에 대해 검사한 결과, 소녀의 아버지에게서도 조류독감 양성 반응이 나왔다. 이렇다 보니 코로나19처럼 사람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또 다시 출몰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국내 전문가들도 AI 확산 상황을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나운성 전남대 수의과대 바이러스학과 교수는 “WHO나 미국 질병관리통제센터(CDC)도 현재 우려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고 판단하지만 만약을 대비해 H5형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주를 확보한 상태”라며 “AI가 포유류에도 감염될 정도로 변이된 것이고 바이러스가 증식할수록 변이는 계속 일어나 사람에 미칠 위험성도 있다”고 말했다.
참고 자료
Emerging Infectious Disease(2023) DOI : https://wwwnc.cdc.gov/eid/article/29/8/23-0188_article#r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