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5000m 해저에는 다람쥐처럼 꼬리를 세우고 모랫바닥을 미끄러져 달리는 동물이 있다. ‘젤리 다람쥐(gummy squirrel)’란 별명을 가진 심해 해삼(학명 Psychropotes longicauda)이다. 유령처럼 새하얀 문어나 탁구공처럼 생긴 해면, 잎처럼 생겨 나리로 불리지만 성게, 불가사리와 같은 극피동물에 속하는 진귀한 동물도 같이 산다.
망간과 구리, 니켈, 코발트 같은 희귀 금속이 담긴 광물이 지천으로 널려져 있다고 알려진 해저 지역에서 5000종 이상 신종(新種)이 무더기로 밝혀졌다. 대부분 이곳에만 사는 종들이었다. 기업들이 눈독을 들이는 해저 광산이 한 번 훼손되면 되살리기 어려운 생태계의 보고(寶庫)로 확인되면서, 앞으로 개발과 보전을 둘러싼 논란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인도 두 배 면적의 생태계 보고
영국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아드리안 글로버(Adrain Glover) 박사 연구진은 지난 26일 국제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태평양 클래리온-클리퍼톤 해역(Clarion-Clipperton Zone, CCZ)에서 총 5578종의 생물을 발견했으며, 이 중 92%는 신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3월 ‘데이터베이스’ 저널에 먼저 해당 해역의 생물종 규모가 발표됐으며, 이번에는 신종의 비율이 공개됐다.
클래리온-클리퍼톤 해역은 하와이와 멕시코 사이에 약 600만 ㎢ 면적의 해저 지역이다. 평균 수심은 5000m이고, 면적은 인도의 두 배에 이른다. 런던 자연사박물관 연구진은 최근 몇 년 동안 이 해역에서 발견된 생물 기록 10만여 건을 분석했다. 그중 해삼과 해면 등 단 6종만이 다른 지역에서 이미 발견된 적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과학자들은 탐사선을 타고 나가 바다 밑바닥으로 채집 상자를 떨어뜨렸다가 건져 올려 그 안에 담긴 생물을 조사했다. 아니면 집게발을 단 무인 잠수정을 내려보내고 원격 조종해 생물을 채집했다. 자연사 박물관 연구진은 “클래리온-클리퍼톤 해역에서 탐사장비를 수면으로 끌어올릴 때마다 신종을 발견한다”며 “지금 결과는 말 그대로 ‘빙산의 일각’이며, 아직 밝혀지지 않은 종이 6000~800종 더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고 밝혔다.
◇4차산업혁명 뒷받침할 해저 광산
클래리온-클리퍼톤 해역은 기업들에 희귀 금속을 얻을 노다지로 주목받았다. 이번 연구를 지원하기도 한 캐나다의 메탈 컴퍼니(The Metals Company) 같은 회사들은 4000m 아래 해저 평원에 널려 있는 금속 단괴(團塊)를 노리고 있다. 바닷물에 녹아 있는 금속 성분이 수백만년에 걸쳐 상어 이빨이나 조개껍질에 층층이 쌓여 생긴 광물 덩어리이다.
금속 단괴에는 4차산업혁명에 필수적인 니켈과 망간, 코발트, 구리 같은 희귀 금속들이 잔뜩 들어있다. 더욱이 기계로 빨아들이기만 하면 바로 채굴이 가능한 보물들이다. 메탈 컴퍼니의 제라드 베런(Gerard Barron) 대표는 미국 워싱턴포스트지에 “지구에서 가장 가벼운 접촉으로 금속을 추출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밝혔다.
해저 광산 채굴은 유엔 산하의 국제해저기구(ISA)가 결정한다. 해저기구는 2001년 이후 채굴 목적의 해저 탐사 31건을 허가했다. 업체들은 해저기구가 채굴 관련 규제안을 발표하면 바로 상업 채굴을 시작할 계획이다. 그 시기는 2024년 말이나 2025년 초로 예측했다. 태평양의 소국인 나우루는 유엔 해양법협약의 조항을 발동해 규제 입안 속도를 더 높이고 있다.
◇캐스퍼 문어를 진짜 유령으로 만들 채굴
해저 광산 개발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심해 채굴이 육상 채굴보다 윤리적 문제가 덜 하다고 주장한다. 심해에는 광산을 개발하느라 현지 원주민을 이주시킬 필요가 없으며, 파괴할 열대우림도 없다는 것이다. 현재 니켈 생산량 1위 국가는 열대우림이 풍부한 인도네시아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해저 광산 개발이 해저 생태계를 파괴할 것이라고 반대하고 있다. 생명체가 거의 없는 사막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던 해저 광산이 수많은 생물이 사는 생태계의 보고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만약 채광기가 금속 단괴를 빨아들이면 해저 퇴적물이 떠올라 심해 생물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 사람들이 미세 먼지에 시달리는 것과 같다.
특히 클래리온-클리퍼톤 해역 탐사 과정에서 많은 심해 생물이 금속 단괴에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관측됐다. 광물만 골라낸다고 해도 희귀 생물을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표적인 예가 미 해양대기청(NOAA)이 지난 2016년 처음 발견한 캐스퍼 문어이다. 몸에 색소가 없어 영화 ‘꼬마 유령 캐스퍼’에 나오는 유령을 빼닮았다고 이런 이름이 붙었다.
캐스퍼 문어는 30개 정도 알을 다른 물체에 붙이고 부화까지 온몸으로 감싸 보호한다. 종종 문어는 알을 더 잘 고정하기 위해 단단한 금속 단괴에 붙인다. 단괴를 채굴하면 캐스퍼 문어가 정말 유령이 된다는 것이다. 지난 2021년 전 세계 과학자 700여명이 “충분하고 강력한 과학적 근거가 확보될 때까지 유엔이 해저 광산의 채굴을 승인하지 말라”고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나라도 오래전부터 해저 광산 개발에 참여했다. 남태평양 통가의 배타적경제수역(EEZ) 내 열수광상 개발권을 갖고 있다. 하지만 동해에서 금속 단괴를 채집하는 로봇을 실험했지만, 실제 채굴은 하지 못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은 “국제해저기구의 심해광물자원개발규칙 제정 논의에 우리나라도 참여하고 있으나 아직 규칙이 확정되지는 않은 상황”이라며 “탐사는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지만, 상업 채굴은 국제 규약이 마련돼야 가능하다”고 밝혔다.
참고자료
Current Biology DOI: https://doi.org/10.1016/j.cub.2023.04.052
Database, DOI: https://doi.org/10.1093/database/baad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