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쓰러지는 개와 잠든 채 옆으로 넘어지는 쥐. 전혀 다른 동물에서 나타난 이상 행동을 쫓던 두 과학자가 수면과 각성을 조절하는 핵심 물질 '오렉신(orexin)'을 찾아냈다. 이는 기면증의 원인을 밝히는 데 이어 불면증과 기면증 치료제 개발로 이어졌다.
11일 래스커재단에 따르면, 야나기사와 마사시 일본 쓰쿠바대 교수와 에마뉘엘 미뇨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 교수가 이 같은 공로로 2026년 래스커 기초의학연구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
두 연구자는 오렉신이라는 뇌 펩타이드를 발견하고, 이 물질이 부족하면 기면증에서 나타나는 통제되지 않는 수면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공로를 인정받았다.
두 사람의 연구 출발점은 달랐다. 야나기사와 교수는 기능을 알 수 없던 뇌 수용체를 연구하다 오렉신을 발견했고, 미뇨 교수는 기면증에 걸린 개의 유전자를 추적하다 오렉신 수용체를 찾아냈다.
◇배고픔을 연구하다 발견한 '잠과 각성'의 물질
1990년대 후반 미국 텍사스대 사우스웨스턴 메디컬센터에서 연구하던 야나기사와 교수는 기능이 밝혀지지 않은 뇌세포 표면의 수용체를 연구하고 있었다. 수용체는 세포 바깥의 신호를 받아 세포 안으로 전달하는 일종의 '안테나' 역할을 한다.
야나기사와 교수 연구팀은 이 수용체에 붙어 신호를 전달하는 물질을 찾았다. 쥐의 뇌에서 추출한 물질을 여러 단계로 분리해가며 수용체를 자극하는 펩타이드를 찾아냈다. 이 물질을 쥐의 뇌에 주입하자 먹이 섭취량이 늘었다.
연구팀은 이 물질이 식욕을 조절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렉신 유전자를 없앤 생쥐를 만들면 먹이를 덜 먹고 살이 빠질 것으로 예상했다. 오렉신이라는 이름도 '식욕'을 뜻하는 그리스어 '오렉시스(orexis)'에서 따왔다.
그런데 예상과 달랐다. 유전자를 없앤 생쥐는 먹이 섭취량이나 체중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연구진이 적외선 카메라로 밤 동안 생쥐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뜻밖의 현상을 발견했다. 오렉신이 없는 생쥐가 깨어서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옆으로 쓰러졌다. 잠시 움직이지 않던 생쥐는 다시 일어나 활동을 재개했다.
뇌파를 확인해보니 단순히 경련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근육의 힘이 빠진 상태에서 뇌는 꿈을 꾸는 단계인 렘(REM)수면 상태를 보였다. 정상적인 수면에서는 비렘수면을 거쳐 렘수면으로 들어가지만, 오렉신이 없는 생쥐에서는 이 과정이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사람의 기면증에서 나타나는 수면 발작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오렉신이 식욕보다도 깨어 있는 상태, 즉 '각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갑자기 쓰러지는 개'에서 같은 물질 찾아
비슷한 시기, 미뇨 교수는 다른 문제를 풀고 있었다. 도베르만과 래브라도리트리버 등 일부 개에서 유전적으로 나타나는 기면증의 원인을 찾는 연구였다.
기면증이 있는 개들은 심하게 졸릴 뿐 아니라 기뻐하거나 흥분하는 등 강한 감정을 느끼면 갑자기 근육의 힘이 빠지며 쓰러졌다. 이를 '탈력발작'이라고 한다.
미뇨 교수는 10년 가까이 개의 유전자를 추적했다. 당시에는 개의 유전체 정보가 충분히 정리돼 있지 않아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결국 기면증에 걸린 개에서 특정 유전자의 이상을 찾아냈다.
그 유전자가 바로 오렉신 수용체 가운데 하나인 '오렉신 수용체 2형(OX2R)'이었다. 야나기사와 교수가 찾아낸 오렉신과 그 수용체가 기면증이라는 같은 현상과 연결된 것이다. 두 연구는 1999년 잇따라 발표됐다.
한쪽에서는 '수면과 각성에 관여하는 물질'을 찾았고, 다른 쪽에서는 '기면증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찾았는데, 두 연구가 같은 생물학적 경로를 가리킨 셈이다.
◇사람의 기면증도 오렉신 부족 때문이었다
이들의 연구는 사람으로 이어졌다.
미뇨 교수 연구팀은 기면증 환자의 뇌척수액에서 오렉신 농도를 측정했다. 그 결과 상당수 환자에게서 오렉신이 검출되지 않았다. 사망한 기면증 환자의 뇌를 살펴본 연구에서도 오렉신을 만드는 신경세포가 크게 사라져 있는 것이 확인됐다.
기면증은 단순히 '잠이 많은 병'이 아니다. 낮에 참기 어려운 졸음이 반복되고, 일부 환자에서는 웃거나 놀라는 등 강한 감정을 느낄 때 갑자기 근육에 힘이 빠지는 탈력발작이 나타난다. 오렉신 신호가 사라지면서 뇌가 깨어 있는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 오렉신을 만드는 신경세포가 사라지는지는 또 다른 연구 과제가 됐다. 현재는 면역체계가 오렉신을 만드는 신경세포를 잘못 공격하는 자가면역 반응이 중요한 원인으로 거론된다. 감염이나 특정 유전적 요인이 이런 면역 반응을 촉발할 가능성도 연구되고 있다.
◇불면증 약 이어 기면증 치료제까지
오렉신 연구는 기초과학에 머물지 않았다. 오렉신이 각성을 유지하는 물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렉신의 작용을 차단하면 잠을 유도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실제로 오렉신 수용체를 차단하는 약물은 불면증 치료제로 개발돼 사용되고 있다. 기존 수면제처럼 뇌 전체를 강하게 억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깨어 있게 만드는 오렉신 신호를 차단하는 방식이다.반대로 오렉신이 부족해 잠이 쏟아지는 기면증에는 오렉신 신호를 되살리는 방법이 연구됐다.
특히 오렉신 수용체 2형을 활성화하는 약물이 개발됐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지난 8월 다케다제약의 오렉신 수용체 2형 작용제 '오제이풀(Orzeyful·성분명 오베포렉스톤·oveporexton)'을 성인 제1형 기면증 치료제로 승인했다.
수면을 둘러싼 오랜 의문이 '쥐가 갑자기 쓰러지는 모습'과 '개가 갑자기 쓰러지는 모습'에서 시작해 하나의 분자 경로로 연결됐고, 결국 실제 환자를 치료하는 약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래스커재단은 두 연구자의 발견이 수면과 각성을 조절하는 분자적 원리를 이해하는 길을 열었으며, 기면증과 다른 수면장애의 새로운 치료법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한편, 파킨슨병에 걸릴 사실을 공개한 뒤 파킨슨병 연구 지원에 헌신해 온 미국 배우 마이클 J 폭스는 공공봉사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시상식은 오는 17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다.
참고 자료
Cell(1999), DOI: https://doi.org/10.1016/S0092-8674(00)81973-X
Cell(1999), DOI: https://doi.org/10.1016/S0092-8674(00)819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