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1일 어린이와 임신부, 65세 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하는 인플루엔자(독감) 백신 국가예방접종(NIP) 시행을 앞두고 백신 공급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보건 당국은 국내사의 일반 접종용 물량까지 NIP 용으로 돌리며 긴급 대응에 나섰다.
NIP 사업에 참여한 글로벌 제약사 사노피-아벤티스코리아(이하 사노피)가 애초 계약한 공급 물량 가운데 50만 도즈를 확보하지 못하면서다. 질병관리청은 사노피의 공급 물량을 줄이는 대신 GC녹십자의 NIP 공급 물량을 50만 도즈 늘리기로 했다. GC녹십자는 당초 민간 시장에 공급할 예정이던 물량을 NIP용으로 전환했다.
보건 당국과 국내 기업이 NIP 사업의 급한 불은 껐지만, 전체 독감 백신 시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량이 줄어든 만큼 향후 수급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남아 있다.
접종을 준비하는 의료 현장에선 백신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병의원 전용 의약품 주문 플랫폼에서 주요 독감백신이 잇따라 동이 나면서 의사들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1일 보건 당국과 의료계에 따르면 질병관리청은 이날 백신 제조·유통사들과 만나 공급 상황을 점검하고 추가 대책을 논의할 예정이다.
◇사노피 50만 도즈 공급 구멍, GC녹십자가 메워
조선비즈 취재를 종합하면, 질병관리청의 2026~2027절기 인플루엔자 NIP 사업 공급사로 선정된 6개 업체 중 한 곳인 사노피는 백신 50만 도즈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최근 보건 당국에 보고했다.
사노피는 국내 백신 생산 업체들과 달리 해외에서 생산한 완제품을 국내로 들여와 공급한다. 올해 생산 일정이 늦어지면서 애초 정한 물량을 맞추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는 "세계보건기구(WHO)의 유행 예상 균주 발표가 예년보다 늦어졌고, 이에 백신 생산이 밀리면서 사노피 코리아가 계약 물량을 맞추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질병청은 국내사 GC녹십자(006280)의 물량을 더 늘리는 방식으로 이를 채웠다.
질병청이 정한 이번 인플루엔자 NIP 조달 물량은 1233만 도즈다. 당초 업체별로 SK바이오사이언스(302440) 270만 도즈, GC녹십자(006280) 266만 도즈, 사노피 225만 도즈, 한국백신 190만 도즈, 보령(003850)바이오파마 177만 도즈, 일양약품(007570) 105만 도즈 등의 공급을 맡았다.
하지만 사노피 공급 물량이 175만 도즈로 줄면서, GC녹십자가 50만 도즈를 대신 추가해 총 316만 도즈를 NIP 사업용 백신으로 공급하게 됐다.
GC녹십자는 "공급 시기를 고려해 기존 민간 시장에 공급할 물량을 NIP로 돌렸다"고 설명했다. 나머지 공급 업체들도 일정에 맞춰 50만 도즈를 추가 생산할 여력은 없다고 보건 당국에 전한 것으로 파악됐다.
질병청은 오는 21일부터 시작되는 독감백신 무료 예방접종에 차질이 없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다만, 민간 시장 물량을 빼 NIP 물량으로 메운 것이라 전체 백신 수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의료계 관계자는 "매년 국내·외 독감 유행에 따라 독감백신 유료 접종 수요 편차가 있다"며 "현재로선 올해 전체 독감백신 물량 50만 회분이 줄어든 격이 됐기 때문에 접종 수요가 예상보다 크게 늘 경우 백신 수급이 빠듯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정부 입찰에 참여한 회사가 공급 물량을 못 맞추는 건 이례적인 일"이라며 "정부가 NIP 사업자를 선정할 때 입찰 가격뿐 아니라 생산 능력과 적기 공급 가능성까지 따져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라 나왔다.
◇NIP 물량 해결했지만…소아과선 백신 수급난
보건 당국과 백신 제조사들은 NIP 물량을 채운 만큼 백신 생산과 공급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현재 의료 현장에선 백신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에 따르면 의사·병의원 전용 의약품 유통 플랫폼인 블루팜코리아와 미소몰닷컴 등에서 주요 백신이 동이 났다.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회장은 전날 본지와 통화에서 "일부 주문 플랫폼만이 아니라 메이저 유통 플랫폼에서 다 매진(일시 품절)된 것으로 조사됐다"며 "현재 국내 의사 회원들이 NIP 대상 백신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앞서 의사들은 독감백신 물량을 충분히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해 왔는데, 수급난이 커진 것이다.
정부가 NIP 독감백신 물량과 공급업체를 정하지만, 의원급 의료기관에 백신을 직접 나눠주는 방식은 아니다. 소아청소년과 의사 등 의료기관이 도매업체나 의약품 유통 플랫폼에서 백신을 직접 구매하기 때문에, 유통 단계에서 의료기관별로 확보량에 차이가 날 수 있다.
일각에선 일부 도매·유통사가 백신 물량 확보 불안을 고가 판매와 끼워팔기 등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의사는 "휴온스 영업사원이 사노피 독감백신 주문이 마감됐으나 독감 치료제와 수액제 등 자사의 다른 의약품을 일정 수량 구매하면 사노피 독감백신을 공급해줄 수 있다는 조건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휴온스(243070)는 사노피와 계약을 맺고 사노피의 독감백신 국내 유통을 맡고 있다.
또 다른 의사는 "소아과에 8000원대로 공급할 NIP 물량은 없고, 1만5000원에 공급할 일반 백신 물량은 있다고 유통사가 설명했다"고 말했다. 한 의사는 "일부 도매·유통사들이 중간 이윤과 영업 실적을 쌓기 위해 수급 불안을 키워 불공정 유통 행위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는 전 회원을 대상으로 매점매석(사재기)·고가(高價) 판매·끼워팔기 등 불공정 거래 사례 제보를 받고 있다. 위법 소지가 있는 유통업체에 대해서는 공정거래위원회 고발과 국세청 세무조사 요청 등 모든 법적 조치에 나설 방침이다.
한편, 2026-2027절기 인플루엔자백신 접종 기간은 오는 21일부터 내년 4월 30일까지다. 올해 영유아·어린이(생후 6개월~14세) NIP 대상자는 약 510만명으로 지난해보다 27만명 늘었다. 2회 접종 대상 어린이와 임신부는 21일부터, 1회 접종 대상 어린이는 28일부터 접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