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질환 치료제의 건강보험 등재 기간을 최대 100일로 줄이는 정부 시범사업의 약제 신청 마감이 나흘 앞으로 다가오면서 의료계와 환자, 제약업계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첫 시범사업에서 최대 5개 약제만 선정하는 만큼, 어떤 약이 최종 명단에 오를지 주목된다. 환자에게 필요한 치료제를 빠르게 공급하는 게 이번 사업의 취지인 만큼, 환자와 전문의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절차 간소화로 환자 치료 기회 앞당겨
27일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 따르면 '희귀질환 치료제 신속등재 시범사업' 약제 신청을 오는 31일 오후 6시에 마감한다. 복지부는 평가를 거쳐 9월 중 대상 약제를 최종 선정할 예정이다.
이번 사업은 희귀질환 치료제가 건강보험에 등재되기까지 걸리는 전체 기간을 기존 최대 240일에서 100일 이내로 줄이는 것이 핵심이다.
건강보험 등재는 의약품에 건강보험을 적용해 환자가 약값의 일부만 부담하고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절차다.
희귀질환 치료제는 그간 제도에서 소외된 측면이 있다. 환자 수가 적은 만큼 임상시험을 통해 충분한 근거를 축적하기 어렵고, 약값이 고가인 특성 탓에 의약품 급여화를 결정하는 주요 기준인 경제성 평가에서 밀리기 일쑤였다. 이런 한계를 고려해 정부가 시범사업에 나선 것이다.
보건 당국으로선 파격적인 제도 변화다.
기존 제도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급여 적정성 평가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약값(약가) 협상 등을 거쳐야 건강보험에 등재된다.
희귀질환 치료제 신속등재 시범사업은 환자에게 치료제를 먼저 공급하고 이후 실제 진료 현장에서의 효과와 안전성 등을 확인하는 '선(先)등재·후(後)평가' 방식이다. 심평원의 급여 적정성 평가 기간은 최대 150일에서 1개월로 줄이고, 약가 협상 절차도 생략한다.
복지부는 신청 약제를 대상으로 대체약제 유무, 질환 중증도, 건강보험 재정 영향, 환자의 안정적인 치료 보장 계획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5개 범위에서 시범사업 대상 약제를 선정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윈레브에어·아이커보·빌주비 등 후보 거론
의료계에선 한국MSD의 폐동맥고혈압 치료제 '윈레브에어', 입센코리아의 원발성 담즙성 담관염 치료제 '아이커보', SK케미칼(285130)이 국내 판권을 보유한 듀센근이영양증 치료제 '빌주비' 등이 이번 시범사업 대상 주요 약제 후보군으로 거론되고 있다.
폐동맥고혈압(PAH)은 폐혈관이 좁아지면서 폐동맥 혈압이 높아지고 심장에 부담을 주는 질환이다. 윈레브에어(성분명 소타터셉트)는 임상시험에서 운동능력을 개선하고 사망 또는 임상적 악화 위험을 낮추는 효과가 확인되면서 환자들이 조속한 급여 적용을 요구하고 있다.
최정현 부산대병원 순환기내과 교수(대한폐고혈압학회 기획이사)는 "폐동맥고혈압은 돌연사 위험이 크고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할 경우 평균 생존기간이 3년에 불과한 중증 진행성 희귀질환"이라며 "국내 환자의 상당수가 사회 활동과 자녀 양육을 병행해야 하는 30~50대 여성으로, 급여 적용이 늦어질수록 골든타임(치료 적기)을 놓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한폐고혈압학회와 한국폐동맥고혈압환우회는 보건 당국과 한국MSD에 윈레브에어 급여 적용과 신속등재 시범사업 참여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다. 한국MSD는 "시범사업 참여 신청을 검토하고 있다"고 답했다.
아이커보(성분명 엘라피브라노르)의 적응증인 원발성 담즙성 담관염(PBC)은 간 안의 작은 담관이 서서히 손상되는 질환이다. 표준 치료제인 우르소데옥시콜산(UDCA)에 충분히 반응하지 않는 환자가 적지 않아 추가 치료제가 필요한 분야로 꼽힌다.
빌주비(성분명 아타랄루렌)의 치료 대상인 듀센근이영양증(DMD)은 근육 단백질인 디스트로핀 생성에 이상이 생겨 근력이 점차 떨어지는 유전성 질환이다. 빌주비는 특정 유전자 변이로 단백질 생성이 중단되는 환자를 대상으로 정상적인 단백질 생성이 이뤄지도록 돕는 원리다.
◇유불리 따지는 제약사…제도 실효성은 과제
환자나 의사로서는 치료제 사용 시점을 앞당길 수 있다는 점에서 시범사업에 대한 기대가 크다. 반면, 제약사들의 속내는 좀 더 복잡하다.
한 제약사 직원은 "환자에게 치료제를 빠르게 공급하고 시장 진입 시점을 앞당길 수 있다는 점이 신속등재 시범사업의 가장 큰 매력이지만 부담 요소도 있어, 얼마나 많은 기업이 신청할지 업계 종사자들 사이에선 관심이 크다"고 했다.
기업들은 약가 책정과 사후평가 요건을 시범사업의 부담 요소로 꼽았다.
정부는 환자 접근성을 높이는 대신 건강보험 재정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도 마련했다. 시범사업 대상 약제는 외국 8개국(A8,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일본, 캐나다) 가운데 3개국 이상에서 등재된 치료제여야 한다. 선정된 약제는 약가 협상 없이 A8 조정 최저가의 90% 수준에서 약가가 정해진다. 또 등재 후에는 실제 환자 치료 성과를 평가해 약가와 급여 조건을 조정할 수 있다.
한 제약사 직원은 "희귀질환 특성상 환자 수가 적어 국내에서 충분한 임상 데이터를 확보하는 게 어려울 수 있다"며 "당국이 사후평가를 통해 미흡하다고 판단하고 약가나 급여 조건을 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담이 따를 수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제도 실효성에 대한 의구심도 있다. 앞서 정부가 신약의 건강보험 진입 기간을 줄이기 위해 도입한 '허가-평가-협상 병행 시범사업'도 애초 취지와 달리 건강보험 등재 및 급여화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 사례가 있어, 새로운 시범사업이 실제로 얼마나 잘 작동할지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이에 제약사들도 유불리를 검토하며 신청 막바지까지 눈치 싸움을 하고 있다. 한 글로벌 제약사 한국법인 임원은 "시범사업 신청 마감을 앞두고 내부 검토 작업과 글로벌 본사와 협의를 하느라 분주하다"고 말했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희귀질환 치료제의 등재 절차를 간소화해 환자에게 필요한 치료제를 신속하게 공급하는 것이 이번 시범사업의 목적"이라며 "시범사업을 통해 효과와 운영 방안을 검증한 뒤 제도화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