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균에 감염돼 사경을 헤매던 환자가 바이러스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이 대장균은 기존 항생제가 듣지 않는 슈퍼박테리아였지만, 세균(박테리아)에 감염되는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가 유전자 가위까지 무장하자 이기지 못했다.
사이마 아슬람(Saima Aslam)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 의대 교수 연구진은 "신장 이식을 받은 65세 남성 환자가 항생제 내성 대장균에 감염돼 상태가 악화되다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탑재한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를 투여받고 회복됐다"고 11일 국제 학술지 '임상 감염 질환'에 발표했다.
◇신장 이식 후 내성균 감염된 환자 치료
세균을 숙주로 삼는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는 1896년 영국의 세균학자 어니스트 핸킨이 인도에서 처음 발견했다. 1917년 프랑스 미생물학자 펠릭스 데렐이 그리스어로 '박테리아를 먹는다'는 뜻에서 지금의 이름을 붙였다. 줄여서 파지라고 한다. 최근 인공지능(AI)이 챗GPT와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를 탄생시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번에 파지 시술을 받은 환자는 신장 이식을 받고 몇 달 뒤 슈퍼박테리아인 대장균에 감염됐다. 어떤 항생제도 듣지 않아 환자의 방광에 커다란 혹이 자라났고 복부에 열린 상처가 생겼다. 아슬람 교수 연구진은 기존 치료법으로는 환자의 감염을 제거하지 못하자, 덴마크 바이오 기업인 스니퍼 바이옴(SNIPR Biome)이 개발한 파지 치료법을 시도했다.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는 세균에 달라붙은 다음 표면에 구멍을 내고 자신의 유전자 DNA를 안으로 집어넣는다. DNA는 세균의 복제효소를 이용해 유전자와 몸통 단백질을 복제한다. 수많은 개체로 불어난 박테리오파지는 세균을 터뜨리고 밖으로 나온다.
이번에 사용한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는 대장균만 골라 죽이도록 크리스퍼 유전가 가위가 탑재됐다. 연구진은 대장균 감염 환자에게 박테리오파지 치료를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열린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방광 혹의 부피는 0.74L(리터)에서 0.37L로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탑재한 박테리오파지 시술이 성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논문 공동 저자인 스니퍼의 에릭 반 데르 헬름(Eric van der Helm) 박사는 "단 한 사례로 유전자 가위를 탑재한 박테리오파지가 항생제 내성균을 없앴다고 결론을 내리기엔 이르다"며 "박테리오파지와 그 전에 쓴 새로운 항생제 조합이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대장균만 골라 파괴하는 유전자 가위
박테리오파지는 세균을 죽이는 능력 덕분에 1920~1930년대 이질과 패혈증 등 다양한 세균성 질환을 치료하는 데 이용됐다. 1940년대 페니실린 항생제가 널리 쓰이면서 잊혔다가 이번처럼 항생제 내성균이 기승을 부리면서 다시 치료제로 주목받고 있다.
스니퍼 바이옴은 박테리오파지에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추가한 치료제 SNIPR001을 개발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DNA를 자유자재로 잘라내는 효소 복합체이다. 보통 잘라낼 DNA를 찾아가 지퍼처럼 결합하는 가이드 RNA와, 결합 부위를 잘라내는 효소 단백질인 캐스9로 구성된다.
스니퍼는 박테리오파지 안에 대장균의 DNA만 찾아가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탑재했다. 또 기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DNA를 잘라내는 캐스9 효소가 들어가지만, 바이러스에 들어간 유전자 가위는 아예 대장균 DNA를 분해하는 캐스3 효소를 갖췄다. 대장균만 찾아 완전히 파괴하는 강력한 유도 미사일을 만든 것과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원래 세균이 자신을 공격하는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기억했다가 다시 만나면 바로 잘라내도록 만든 면역 체계에서 유래했다. 과학자들이 세균의 방어 무기를 가져와 세균을 잡는 데 역이용한 셈이다.
회사는 앞으로 추가 임상시험을 통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탑재한 파지 바이러스의 효능을 확실하게 입증할 계획이다. 이미 이번처럼 환자가 경비를 대는 임상시험 12건을 요청받았다고 밝혔다. 또 미국에서는 암 치료를 받는 환자에게 같은 파지 바이러스로 임상 2상 시험을 하고 있다. 일부 암 치료법은 대장균 감염의 위험을 높인다.
참고 자료
Clinical Infectious Diseases(2026), DOI: https://doi.org/10.1093/cid/ciag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