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관련 법 개정에 앞서 의사의 재량으로 임신중지 약물 처방을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의료계는 "입법 없는 행정 허용은 헌법 질서를 훼손하고 의료현장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며 공개 반대에 나섰다.

국민의힘 조배숙·김미애·백종헌·안상훈·서명옥·한지아 의원은 2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이재명 정부의 낙태약물 무법적 허용의 문제점' 긴급 학술세미나를 열었다. 태아여성보호국민연합이 주관한 이날 행사에서 발표자들은 정부가 추진 중인 임신중지 약물 도입이 법적 근거 없이 이뤄질 경우 헌법 질서와 의료체계 모두에 부담을 안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임신중지 약물 도입을 123대 국정과제에 포함시키고 관련 논의를 본격화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4일 국무회의에서 "법으로 몇 주까지 허용할지를 논하다 임기가 끝날 수 있다"며 "의사의 양심과 재량에 맡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원민경 성평등가족부 장관도 "직을 걸겠다는 각오로 임기 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박성민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가 2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이재명 정부의 낙태약물 무법적 허용의 문제점' 긴급 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하고 있다./박수현 기자

◇"헌재가 국회에 맡긴 문제...행정부가 대신 결정해선 안 돼"

박성민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대통령의 최근 발언이 기존 입장과 배치된다고 지적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성평등가족부 업무보고 당시 "법률에 명확하게 되지 않는 한 행정적 조치로는 처리할 길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번 국무회의에서는 "어정쩡한 봉합이라도 방치보다 낫다"며 의사 재량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박 교수는 헌법재판소의 2019년 헌법불합치 결정 취지를 근거로 들었다. 당시 헌재는 낙태죄를 즉시 폐지하지 않고 입법 시한을 부여하면서,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사이의 기준은 국회가 법으로 정하도록 했다.

그는 "입법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행정부가 행정 조치만으로 약물낙태를 허용하는 것은 헌재 결정 취지에 반한다"며 "국회가 결정해야 할 문제를 행정부가 대신 판단하는 것으로 삼권분립 원칙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이미 법적 공백이 현실화했다고도 지적했다. 그는 의사에게 살인죄는 인정하면서도 낙태죄는 무죄를 선고한 대법원 판결을 예로 들며 "입법 없이 약물낙태를 허용하면 헌재가 우려했던 법적 공백은 더욱 고착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임신 몇 주까지 허용할지, 사회·경제적 사유를 어디까지 인정할지, 상담과 숙려기간을 둘지는 모두 입법의 영역"이라며 "의사가 개별 판단으로 정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또 현행 약사법상 의약품에 임신중지를 암시하는 표시를 금지하는 규정과 충돌할 가능성,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기존 입장을 뒤집어 허가를 강행할 경우 담당 공무원이 직무유기나 직권남용 논란에 휘말릴 수 있다는 점도 문제로 제기했다.

허가 절차와 안전성 검증 문제도 언급했다. 박 교수는 한국인의 약물 대사 특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만큼 외국 임상자료만으로 허가를 내리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며,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가교임상시험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식 통계보다 합병증 22배"...안전성 논란도 제기

장지영 이화여대 서울병원 교수는 임신중지 약물의 안전성을 뒷받침하는 기존 통계 자체가 실제 위험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미국 사례도 소개했다. 미국 윤리정책센터(EPPC)가 2017~2023년 약 86만건의 보험청구 자료를 분석한 결과 약물을 사용해 임신을 중지한 여성의 10.9%가 중대한 부작용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 식품의약국(FDA)과 제조사가 제시한 0.5% 미만보다 약 22배 높은 수치라는 설명이다.

영국에서도 국민보건서비스(NHS) 자료를 분석한 결과 실제 합병증은 1만1000건이 넘었지만 정부 공식 통계에는 300건만 반영됐다고 소개하며 "약물낙태는 '안전한 시술'이라기보다 통계에서 충분히 포착되지 않은 위험을 안고 있다"고 말했다.

핀란드 국가보건등록자료를 분석한 연구에서는 약물 사용 임신중지의 전체 합병증 발생률이 수술낙태보다 약 4배 높았으며, FDA 역시 '미페프리스톤'의 안전성을 재검토하고 있다는 점도 언급했다.

장 교수는 원격진료와 우편배송이 확대된 해외 사례에서는 자궁외임신 확인이 어렵고, 금기사항 확인이나 응급상황 대응이 늦어질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 미국 텍사스에서 전 남자친구가 약물을 음식에 몰래 넣어 유산을 유발했다는 소송 사례를 소개하며 "접근성 확대는 새로운 의료·사회적 위험을 함께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약물 도입 이전에 의료 안전망부터 갖춰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낙태를 경험한 여성 상당수가 가족이나 배우자의 압력 속에서 결정을 내렸다는 연구도 있다"며 "약물 접근성을 확대하기 전에 위기임신 여성을 지원할 사회안전망을 먼저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