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임신중지 의약품 도입과 관련해 '법 개정 이전에도 의료진 재량에 따른 사용 방안을 검토하라'고 주문했다. '모자보건법 개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이유로 허가 심사를 미뤄온 식품의약품안전처의 기조에 변화가 생길지 관심이 쏠린다.

이 대통령은 지난 14일 국무회의에서 "법 밖에 방치하며 정부는 책임을 모면하겠지만 국민은 위험에 빠진다"며 "낙태 허용 기간을 몇 주로 할지를 두고 논쟁하다 보면 임기가 끝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기준이 정해지기 전이라도 의사가 재량으로 판단하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 "모자보건법 개정 전에라도 약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4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뉴스1

◇헌재 결정 7년째 입법 공백…불법 유통만 커졌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2020년 말까지 대체 입법을 마련하라고 요구했지만, 이후 국회는 임신중지 허용 주수를 둘러싼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21대 국회에서 관련 법안은 모두 폐기됐고, 22대 국회에서도 모자보건법 개정안은 상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입법 공백이 이어지는 동안 불법 시장은 커졌다. 식약처에 따르면 2021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적발된 임신중지 의약품 불법 판매는 2641건에 달했다. 적발되지 않은 거래까지 감안하면 실제 유통 규모는 더 클 것으로 추정된다.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약품 상당수는 해외 복제약으로, 정품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고 가짜 약 피해나 부작용 발생 시 의료적 보호를 받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건복지부는 그간 제도 개선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신중한 입장을 유지해 왔다. 정은경 장관은 지난해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헌법불합치 이후 안전 문제가 있는 상황인 만큼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사안"이라며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건강권을 균형 있게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식약처는 '모자보건법 개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임신중지가 가능한 주수와 허용 범위가 법률로 정해져야 효능·효과와 위해관리계획(RMP) 등 핵심 심사 항목을 평가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식약처는 이날도 관련 조선비즈 질의에 "법률 개정으로 약물에 의한 임신중지 허용 여부와 허용 기간이 법률로 정해져야 일부 허가 요건 자료를 심사할 수 있다"며 "성평등가족부와 복지부 등 관계 부처와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식약처가 이 같은 입장을 유지하면서 현대약품의 품목허가 심사도 사실상 멈춰 있다. 현대약품은 2021년 영국 라인파마의 '미프지미소' 국내 독점 판권을 확보한 뒤 같은 해 품목허가를 신청했지만, 보완자료 제출 문제로 2022년 자진 취하했다. 2023년 재신청했으나 자료 보완 요청으로 심사가 중단됐고, 2024년 12월 다시 품목허가를 신청한 이후 현재까지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국회에서는 식약처의 법적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식약처가 2021~2023년 외부 로펌 6곳에 의뢰한 법률 자문 가운데 4건이 '모자보건법 개정 없이도 허가 심사가 가능하다'는 취지였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지난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는 "허가를 미루는 것이 오히려 재량권 남용"이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지난해 9월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서 열린 '9.28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 맞이 기자회견에서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네트워크 활동가들이 국정과제로 약속한 유산유도제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뉴스1

◇의료계는 반발, 약사회는 환영…정부 선택 주목

대통령 발언을 둘러싼 의료계와 약사단체의 반응은 엇갈렸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발언 철회를 요구하며 반발했다. 의사회는 14일 "안전성 가이드라인과 유통 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조기 허용은 국민을 위험한 생체 실험장으로 내모는 것"이라며, 약물 투여 전 임신 주수 확인부터 투약 후 완전 배출 여부 확인까지 산부인과 전문의의 관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임신중지 의약품의 주성분인 미페프리스톤은 미국에서도 전문의약품으로 관리되며 자궁외 임신 배제와 정확한 임신 주수 확인 등을 거쳐 처방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같은 날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는 환영 논평을 내고 "임신중지 의약품 허가에 그칠 것이 아니라 성·재생산 건강권 보장 논의로 이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가장 잘 알려진 임신중지 의약품 '미프진'은 세계보건기구(WHO)가 2005년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한 약물로 현재 100여 개국에서 사용되고 있다. WHO는 임신 12주 이내 사용을 권고하고 있으며,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임신 9주 6일 이내 사용을 권고하고 있다.

다만 미프진이 국내 허가를 받더라도 일반의약품처럼 약국에서 자유롭게 구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해외 주요국처럼 전문의약품으로 의사 처방과 진료, 사후관리 체계 아래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

관심은 대통령 지시 이후 정부가 기존 원칙을 유지할지, 아니면 법 개정 이전에도 미프진 허가 절차를 추진할 새로운 행정적 해법을 내놓을지에 쏠린다. 복지부는 지난 3월 국회에서 상반기 내 관계부처 협의를 마무리하겠다고 밝힌 바 있어, 오는 16일 업무보고에서 구체적인 추진 방향이 제시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