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타다(Ust'Ida) 1 묘지에 페스트 희생자들과 같이 묻힌 9-11세 소녀의 두개골./Angela Lieverse

5500년 전 시베리아의 소규모 수렵채집 사회에서 페스트 대유행(팬데믹)이 발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흑사병(黑死病)이라고 불린 페스트는 지금까지 농업 발달로 인구가 급증하면서 시작됐다고 알려졌다. 이번 연구 결과는 가장 오래된 흑사병 대유행의 증거라는 평가를 받았다.

에스케 빌레르슬레브(Eske Willerslev) 덴마크 코펜하겐대 교수가 이끈 국제 공동 연구진은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주변 묘지 4곳에서 발굴된 수렵채집인 유해에서 페스트균의 DNA를 발견했다"고 18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이번 연구에는 영국·미국·캐나다·중국·러시아 과학자들도 참여했다.

◇유해 40%에 페스트균, 팬데믹 증거

페스트는 쥐와 벼룩이 옮기는 페스트균(학명 Yersinia pestis)이 유발하는 감염병이다. 환자의 피부가 검게 변한다고 해 흑사병이라고 불렀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14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흑사병으로 500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주로 인구가 밀집한 도시에서 퍼졌다.

연구진은 시베리아의 묘지에 묻힌 수렵채집인 유해의 치아에서 박테리아의 DNA를 찾아 분석했다. 그 결과 45명 중 40%에 해당되는 18명에서 페스트균의 DNA가 검출됐다. 연구진은 이를 근거로 지금으로부터 5520~5265년 전과 5315~4235년 전 두 차례에 걸쳐 시베리아의 수렵채집 사회에 페스트 팬데믹이 발생했다고 추정했다.

5500년 전 바이칼 호수 지역의 수렵채집민들이 페스트 희생자들을 매장하는 모습의 상상도./Kelvin Wilson

페스트균이 나온 유골이 절반도 되지 않는데 팬데믹이라고 하는 것은 DNA의 특성 때문이다. 페스트 희생자라도 시간이 지나면 뼈나 치아에 남은 페스트균의 DNA가 분해돼 사라진다. 14세기 페스트 희생자들이 매장된 영국 런던의 이스트 스미스필드 묘지에서도 페스트균 DNA가 나온 유해가 20%에 불과했다. 이 점에서 이번 발견은 고대 페스트 팬데믹의 강력한 증거로 평가된다.

수렵채집인 사회는 농경 사회보다 인구 밀도가 낮다. 주로 가족 단위의 소규모 집단이다. 연구진은 가족이나 친척 등이 함께 묻힌 무덤에서 페스트균이 나온 것은 이런 소규모 사회에서 밀접 접촉을 통해 페스트균이 전파된 증거라고 밝혔다. 페스트가 퍼진 상황에서도 당시 장례 풍습대로 강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시신을 매장한 것도 유대감이 친밀한 가족 집단임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벼룩 없이 동물에서 직접 감염

연구진은 시베리아에 창궐한 페스트는 중세와 달리 호흡기로 감염되는 폐페스트였다고 밝혔다. 중세 페스트는 쥐벼룩이 옮긴 선(腺)페스트였다. 페스트균이 있는 쥐의 피를 빤 벼룩이 다시 사람 피를 빤 과정에서 균이 림프절에 감염된다는 의미다. 그러면 림프절이 달걀만 하게 부어오르고 극심한 통증(가래톳)을 동반한다.

폐페스트에 대한 증거도 유전자에서 나왔다. 고대 유해에서 나온 페스트균에는 중세 페스트균과 달리 ymt 유전자가 없었다. 이 유전자가 만드는 단백질은 페스트균이 벼룩의 장에서 증식할 수 있도록 보호한다. ymt 유전자가 없으면 페스트가 벼룩을 통해 전파될 수 없다. 그렇다면 페스트균이 숙주동물에서 사람으로 바로 옮아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우스티다(Ust'Ida) I 묘지의 유해들. DNA 분석 결과 두 명은 어머니가 같은 이복 자매로, 나이가 각각 9~10세와 5~6세였다. 세 번째 유해는 11~12세 소년으로, 소녀들과 혈연 관계는 없었지만, 같은 시기에 매장됐고 모두 페스트 DNA가 검출됐다./Vladimiri Bazaliiskii

시베리아의 무덤과 주변에서는 설치류인 마멋의 이빨과 뼈들이 많이 나왔다. 연구진은 무덤의 주인들은 생전 마멋을 사냥하고 고기를 다루며 살았다고 추정했다. 그렇다면 페스트균이 있는 마멋의 체액이나 혈액이 에어로졸(미세 입자) 상태로 사람의 폐로 들어갈 수 있다. 고대인의 유해에서는 동물을 통해 감염되는 브루셀라균의 DNA도 나왔다. 당시 수렵채집인들은 야생동물을 많이 접하다 보니 늘 질병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대 페스트의 또 다른 특징은 희생자들이 주로 사춘기 이전 8~11세 아동들이었다는 점이다. 공동 교신 저자인 마틴 시코라(Martin Sikora) 코펜하겐대 교수는 "벼룩을 통한 효율적인 전염 방식을 진화시키기 전에도 고대 페스트균은 감염을 치명적으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독성 인자 조합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고대 페스트균에는 YPM 슈퍼항원 유전자가 있었다고 밝혔다. 일반 항원은 그에 맞는 항체와 만나 적절한 면역반응을 유발하지만, 슈퍼항원이 몸에 들어오면 아무 항체나 우격다짐으로 결합해 폭발적인 면역반응을 일으킨다. 성인은 어릴 때 한 번 이런 항원에 노출돼 면역력을 가졌기에 슈퍼항원에 덜 민감할 수 있지만, 면역력이 약한 아동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라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참고 자료

Nature(2026),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6-105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