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에 뿌리는 항체 스프레이가 동물은 물론 인체에서도 독감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겉모습이 계속 바뀌어 해마다 백신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이번에 시험한 항체는 바이러스에서 거의 변하지 않는 부분에 결합해 어떤 종류의 변이에도 대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네덜란드 바이오 기업인 레이덴 랩스(Leyden Laboratories)는 "CR9114 항체로 만든 비강 스프레이가 동물실험과 초기 임상시험에서 독감 예방 효과를 보였다"고 5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중개의학'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실제 독감 바이러스에 노출시키는 동물 실험을 했고, 인체 임상시험에서는 항체가 안전하고 코에서 일정 수치를 유지하는지 확인했다.
◇동물서 독감 예방, 인체서도 안전성 입증
CR9114는 미국 존슨앤드존슨(J&J)의 자회사인 얀센이 개발한 항체이다. 항체는 바이러스에 결합해 인체 세포에 침투하지 못하게 무력화시킨다. 이후 다른 면역세포를 불러 바이러스를 제거한다.
하지만 동물의 혈관에 주사했을 때는 독감 예방 효과가 크지 않았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코로 먼저 침입하는데 혈관으로 들어간 항체가 코에 도달하는 양이 적었기 때문이다.
레이덴 랩스는 2022년 얀센에서 CR9114를 도입해 혈관 주사 대신 코에 분사할 수 있는 스프레이로 개발했다. 주사제를 스프레이 형태로 만들기 위해 항체 일부만 사용했다. 항체는 Y자 구조이다. 양쪽으로 갈라진 가지인 Fab는 바이러스에 결합하고 기둥 격인 Fc는 다른 면역세포와 결합한다.
연구진은 Fab만 코에 뿌려도 독감을 예방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이번에 쥐와 원숭이의 코에 CR9114를 분사했더니 인플루엔자 A형, B형 바이러스에 노출돼도 독감이 발병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감 바이러스에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A, B, C형 세 가지가 있는데, 사람에게 병을 일으키는 것은 A형과 B형이다.
연구진은 동물에 이어 18세에서 55세 사이의 143명을 대상으로 초기 임상시험도 진행했다. 하루 두 번 스프레이를 투여하면 참가자들의 코 안쪽에서 항체 수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며, 큰 부작용은 나타나지 않았다.
연구진은 사람 코에 스프레이를 뿌린 후 생체 시료를 채취해 다양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시험했다. 스프레이의 항체는 다양한 바이러스에 결합했다. 범용 독감 예방약이 될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독감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백신이다. 바이러스의 일부를 인체에 투여해 미리 항체를 만들도록 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해마다 백신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레이덴 랩스의 항체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서 거의 변화가 없는 헤마글루티닌(HA)의 줄기 부분을 공략한다. 헤마글루티닌은 바이러스가 사람 호흡기 세포에 달라붙는 열쇠 역할을 한다. 이 부분을 차단해 다양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변이에도 효과, 범용 예방약 가능
다음 단계는 스프레이를 사용한 사람들을 실제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직접 노출시켜 독감을 예방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인체의 안전성만 확인했지 실제 상황에서 예방 효능을 입증하지는 못했다.
전문가들은 항체 스프레이는 임상시험을 모두 통과해도 여러 면에서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바이러스가 코뿐 아니라 입으로도 침투할 수 있어 스프레이가 독감을 100% 차단할 수 없다. 또 백신은 독감 유행 시기에 한 번만 주사하지만 스프레이는 하루에 두 번씩 뿌려야 하는 단점도 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항체 스프레이가 상용화되면 조류인플루엔자처럼 예상치 못한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을 막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2024년부터 미국 18개 주에서 젖소들이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전 세계 보건 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가축은 물론 야생 포유류와 사람까지 감염되고 사망자도 나왔다.
레이덴 랩스는 이번에 스프레이를 뿌린 사람의 코에서 채취한 생체 시료를 2013년 중국에서 사람에게 전염된 조류 인플루엔자 A형 바이러스에 시험해 항체의 효과를 확인했다. 전문가들은 팬데믹이 발생했을 때 항체 스프레이가 백신이 보급되기 전까지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이나 의료진을 보호할 수 있다고 본다.
또 항체 스프레이는 단기간에 많은 사람에서 항체를 만들어 집단 면역 효과를 빨리 얻을 수 있다. 백신 주사를 맞고 항체가 생성되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스프레이는 바로 예방 효과를 낼 수 있다.
참고 자료
Science Translational Medicine(2026), DOI: https://doi.org/10.1126/scitranslmed.adz1580
Scientific Reports(2025), DOI: https://doi.org/10.1038/s41598-025-943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