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살아 있을 때 경험을 재구조화하지 않으면 다음 위기에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6년. 질병관리청이 감염병 위기 대응의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방역의 초점을 '대응'에만 두지 않고, 대비–대응–회복을 하나의 시간축으로 묶는 전주기 체계로 전환하겠다는 구상이다. 회복 국면이 마무리되며 현장의 기억과 조직의 긴장도가 빠르게 옅어지는 지금이, 다음 팬데믹을 준비할 사실상 마지막 골든타임이라는 판단에서다.

임승관 질병청장은 19일 충북 청주시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코로나19는 국민의 통합된 노력으로 이겨냈지만, 당시의 대응에는 즉흥적 판단과 임시방편도 분명히 섞여 있었다"고 돌아봤다. 이어 고령화로 인한 취약계층 증가, 제한된 재정 여건, 인공지능(AI)을 비롯한 과학기술 환경 변화를 모두 고려할 때 "과거의 방식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진단했다.

질병청은 이를 위해 두 달 전 감염병 위기 대응 태스크포스(TF)를 가동하고, 대응 체계 전반을 다시 짜는 작업에 착수했다.

임승관 질병관리청장이 19일 충북 청주시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감염병 위기관리 체계 고도화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청주=박수현 기자

질병청은 감염병 위기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대응 체계를 고도화할 방침이다. 메르스나 에볼라처럼 병독성은 높지만 전파력은 제한적인 감염병은 '제한적 전파형'으로 분류한다. 이 유형에 대해서는 늦어도 수개월 내 봉쇄와 퇴치를 목표로 삼고, 고도화된 격리 치료시설과 전문 의료 인력을 단기간에 집중 투입한다.

반면 신종플루나 코로나19처럼 전파력은 높지만 치명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감염병은 '팬데믹형'으로 분류한다. 이 경우 목표는 조기 종식이 아니라, 위험을 관리하며 사회를 회복 국면으로 옮기는 데 있다.

임 청장은 "팬데믹 대응의 본질은 위험을 통제하는 동안 시간을 벌어 실체를 규명하고, 백신·치료제·진단 도구로 위험을 낮춘 뒤 사회를 단계적으로 다시 여는 데 있다"며 "이 과정이 시간축에 따라 순차적으로 작동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질병청의 역할도 달라진다. 단순히 방역 지침을 집행하는 기관이 아니라, 감염병 정보를 수집·분석하고 그 결과를 의료 대응과 사회 정책으로 연결하는 허브로 기능하겠다는 구상이다.

전주기 대응의 핵심 거점으로는 감염병전문병원을 활용한다. 제한적 전파형 감염병에 대해서는 중증 환자 격리와 전문 치료를 맡고, 팬데믹형 감염병에 대해서는 위험 실체 규명과 함께 백신·치료제 개발, 의료체계 확장을 위한 교육·훈련 기능을 수행한다. 감염병전문병원은 내년부터 2030년까지 순차적으로 총 6곳이 문을 연다.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 개발도 속도를 높인다. 질병청은 2028년까지 국산 코로나19 mRNA 백신의 품목 허가를 마치고, 백신 플랫폼 기술을 국내에 내재화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현재 개발 물질은 임상 1상 단계에 진입했다.

임 청장은 "플랫폼이 완성되면, 향후 새로운 팬데믹이 선언될 경우 200일 이내에 백신을 개발할 수 있는 대응 체계를 갖추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의사결정 구조도 개선한다. 질병청은 내년 보건복지부 소관이던 긴급치료병상을 이관받아 병상 배정의 효율성을 높일 계획이다.

2024년 1월 2일 오전 대구 달서구보건소 관계자들이 운영이 종료된 코로나19 선별진료소 물품을 정리하고 있다./뉴스1

코로나19 초기 확진자 동선 공개나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 과정에서 나타난 시행착오는 교훈으로 삼는다. 질병청은 앞으로 단순 확진자 수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영향을 함께 고려해 거리두기 등 사회적 조치를 결정하고, 공중보건·사회 대응 매뉴얼에 인권 보호 원칙을 명시할 방침이다.

임 청장은 "초기에는 위험의 실체를 알기 전까지 통제적 정책이 불가피할 수 있지만, 중기에는 과학적 근거에 따라 제약의 강도와 방식을 조정해야 하고, 회복기에는 사회 정상화를 전제로 한 최소 개입 원칙이 작동해야 한다"며 "대응 단계별로 국가가 취할 수 있는 조치와 국민이 감내해야 할 수준을 미리 설계해 두는 것이 전주기 대응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전주기 대응을 뒷받침할 재정 기반은 과제다. 임 청장은 "감염병 대응은 속도가 중요한 만큼 일반적인 국가 재정 투입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감염병 국민 보건위기 대응 기금'을 마련하는 것이 질병청의 바람"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출국자에게 부과되던 국제질병퇴치기금을 부활시켜, 그 일부를 감염병 위기 대응 기금으로 적립하는 방안을 언급했다. 해당 기금은 국제선 항공권에 인당 1000원을 부과해 개발도상국 질병 예방과 퇴치에 사용됐으나, 2025년부터 폐지됐다.

임 청장은 "기금을 복원해 공적개발원조(ODA)에 100% 쓰기보다는, 약 50%는 국내 감염병 위기 대응을 위해 적립해 두었다가 위기 시 즉시 활용하는 구조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임 청장은 끝으로 코로나19 대응을 두고 "K-방역은 90점이었다"고 평가하면서도 "점수에 안주할 수는 없다"며 "감염병으로부터 한 명의 국민이라도 더 지키는 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라고 강조했다.

질병청은 전문가와 국민 의견 수렴을 거쳐 오는 7월 감염병 위기 대응 체계 고도화의 최종안을 발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