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법으로 정해진 건강보험 국고지원 기준을 제대로 지키도록 하는 법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보험료는 해마다 오르는데도 국고지원은 '재정 여건'을 이유로 법정 기준에 못 미쳐 온 관행이 반복되면서, 누적 미지급액은 20조원을 넘어섰다.
국고지원 부족이 재정 악화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법에 명시된 최소한의 국가 책임조차 이행되지 않는 구조에서 건강보험의 장기 지속 가능성을 논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상치 대신 결산 기준…국고지원 산정 방식 손본다
지난 2일 전진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민건강보험법과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을 각각 발의했다. 정부가 건강보험 재정에 부담해야 할 몫을 정하는 산정 기준을 손보는 것이 핵심이다.
현행 법은 정부 지원 규모를 '해당 연도에 걷힐 것으로 예상되는 보험료 수입'을 기준으로 계산하도록 하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이 기준에 법정 비율을 적용해 왔지만, 예상 수입이 매년 보수적으로 산정되면서 실제 예산에서는 국고지원이 반복적으로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다. 개정안은 이를 '전전년도 결산상 보험료 수입'으로 바꿔, 이미 확정된 수치를 기준으로 정부 부담을 계산하도록 했다.
지원 비율도 법에 명시했다.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은 전전년도 결산 기준 보험료 수입의 20%,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은 같은 기준으로 6%를 지원하도록 했다. 두 법안을 합치면 정부의 건강보험 재정 지원 비율은 총 26%다.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에는 국고지원에 붙어 있던 일몰 규정을 삭제하는 내용도 담겼다. 국고지원을 일정 기간마다 연장 여부를 따지는 임시 조항이 아니라, 정부가 상시적으로 부담해야 할 재정 의무로 분명히 하겠다는 취지다.
비슷한 취지의 법안은 이미 국회에 계류돼 있다. 지난해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정 의원안이 산정 기준과 일몰 규정 개선에 초점을 맞췄다면, 전 의원안은 지원 비율과 산정 방식을 법에 직접 고정해 예산 편성 과정에서의 정부 재량을 한층 더 제한하려는 성격이 강하다.
◇관행이 된 미달…17년간 쌓인 미지급 21조원
국회가 다시 법 개정에 나선 배경에는 국고지원 미달이 해마다 반복돼 온 현실이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4년 국민건강보험료 수입은 83조9520억원이었다. 법정 기준에 따른 정부 지원금은 13조8051억원이었지만, 실제 지급액은 12조1658억원으로 1조6393억원이 부족했다.
현행 법은 건강보험료 예상 수입의 20%를 정부가 지원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14%는 일반회계, 6%는 담배부담금으로 조성된 건강증진기금에서 마련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국고지원은 매년 10% 초반대로 법정 기준에 못 미쳤다.
2019년을 제외하면 최근 몇 년간 정부가 산정한 보험료 예상 수입이 실제보다 낮게 잡히면서, 법정 비율을 적용해도 지원액이 줄어드는 구조도 반복됐다. 경제성장률이나 의료 이용 증가 같은 변수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채, 보험료 인상률 중심으로 예상치가 산정되면서 이런 관행이 굳어졌다는 지적이다.
건강증진기금 역시 제약 요인이다. 담배부담금 수입의 65%를 넘을 수 없도록 한 규정 탓에, 건강보험 재정 안정이라는 본래 취지와 달리 지원 여력이 제한된다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2007년부터 2024년까지 법정 기준대로라면 정부가 지원했어야 할 금액은 149조7617억원에 달하지만, 실제 지원액은 128조332억원에 그쳤다. 이 기간 누적 미지급액은 21조7000억원이다.
올해도 예상 보험료 수입 약 90조9000억원 가운데 약 14% 수준인 12조7000억원가량이 국고로 지원될 예정이다. 전년(약 12조6000억원)보다 소폭 늘었지만, 법정 비율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한다.
◇가입자 부담 늘었지만 재정 경고등…"보험료만으론 한계"
가입자 부담은 장기적으로 늘어왔다. 올해 건강보험료율은 1.48% 인상돼 직장가입자는 월평균 2235원, 지역가입자는 1280원을 더 부담하게 됐다. 일부 연도에서 보험료율이 동결되기도 했지만, 평균 부담액은 꾸준히 증가하는 흐름이다.
이에 따라 건보료 수입은 지난해 87조7118억원에서 올해 92조9962억원으로 5조2844억원 늘어날 전망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22년 이후 4년간 건보료 수입은 16조원 이상 증가한다.
그럼에도 기획재정부의 '제3차 장기 재정전망(2025~2065)'은 현 구조가 유지될 경우 건강보험이 2025년 적자로 전환된 뒤 2033년에는 누적 준비금이 소진될 것으로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국고지원 확대가 재정 악화를 해결하는 만능 해법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다만 법에 명시된 지원 기준조차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지출 관리나 제도 개편 논의 역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는 점은 공통된 지적이다. 국고지원은 재정 위기를 단번에 해소하는 처방이 아니라, 보험료 인상으로만 부담을 떠넘기는 구조를 완화하기 위한 전제 조건에 가깝다는 것이다.
복지부는 재정 여건의 한계를 강조한다. 김한숙 복지부 보험정책과장은 "국가 재정은 다른 분야에도 써야 할 곳이 많아 여러 여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다"며 "국고지원도 매년 조금씩이라도 늘리려고 노력해 왔다"고 말했다.
의료계에서는 국고지원 미달이 장기화되면서 그 부담이 보험료 인상으로 이전되고 있다고 본다. 특히 보험료 인상에 취약한 저소득층이나 재난적 의료비가 발생한 가구의 경우, 건강보험의 보호 기능이 충분히 작동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은혜 순천향대 부천병원 영상의학과 교수는 "국고지원이 늘어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필요도 기반 배분과 지출 우선순위가 함께 지켜지지 않으면, 법정 국고지원이 있더라도 장기적인 재정 불안과 가계 부담의 불평등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와 독일, 네덜란드 등은 국고지원과 보험료 조정, 지출 관리 장치를 함께 운용하며 재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며 "우리도 사회보험의 기본 원칙을 지키려면 최소한 법정 국고지원 기준부터 일관되게 이행하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