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의료비 부담을 덜기 위한 사회 안전망인 건강보험 제도는 1977년 도입됐다. 이후 적용 대상을 단계적으로 넓혀 1989년 전 국민 건강보험 체계를 완성했다. 병실료를 시작으로 MRI·초음파 검사까지 보장 범위도 지속적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보장성 강화와 함께 재정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급여 기준을 둘러싼 형평성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탈모는 생존의 문제"라며 탈모 치료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확대 검토를 지시하면서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건강보험 제도를 둘러싼 주요 쟁점과 보장성 강화의 득과 실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초고령화가 가속화되면서 건강보험 재정에 대한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출 구조를 손보지 않으면 건강보험은 머지않아 지속 불가능한 상태에 이를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현장의 모습은 우려와 정반대다. 필요성 논란이 있는 MRI·CT 검사가 반복되고, 사망을 앞둔 환자에게까지 과잉 진료가 권해지는 사례가 끊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건강보험 재정이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5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사회 보장 장기 재정 추계 통합 모형 구축' 보고서에 따르면, 2050년 건보 총지출은 296조4000억원, 총수입은 251조8000억원으로, 법정 최고 수준인 8%까지 보험료를 올려도 44조6000억원 적자가 발생할 전망이다.
홍석철 서울대 경제금융연구센터장은 "올해 7.19%인 건보료율이 2030년 8%까지 오를 것"이라며 "법을 고쳐 보험료를 올리는 방법도 있지만 젊은 세대 반발이 예상된다. 현실적 해법은 지출 효율화"라고 강조했다.
◇"급여, 한 번 적용하면 못 돌이켜"...의료 필수성 따져 엄격히 판단해야
이러한 가운데 이재명 정부는 탈모 치료제까지 건보 적용을 논의하고 있다. 국내 탈모 인구만 약 1000만명. 절반만 급여 대상으로 해도 연간 1조원 안팎이 새 나갈 것으로 추산된다. 이미 문재인 케어로 MRI·초음파 등 불필요한 급여가 확대되면서 건보 지출은 통제 불능 상태다.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급여는 의료 필수성에 따라 엄격히 판단해야 한다. 탈모처럼 선택적 의료를 급여화하면 이용이 폭증하고 재정 부담은 눈덩이처럼 커진다"고 말했다.
한번 급여로 편입되면 되돌리기조차 어렵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관계자는 "급여 취소 사례는 드물고, 별도 절차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탈모 치료제의 경우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품목 허가가 취소되는 경우 급여 목록에서 삭제될 수 있다"고 했다.
◇"수가제 뜯어 고쳐 과잉 진료 막아야"
우리나라 의료비 구조의 근본 문제는 행위별 수가제다. 검사·진료를 많이 할수록 병원이 돈을 더 받는 구조 때문에 과잉 진료가 만연하다.
홍 센터장은 "환자 본인 부담이 적고, 의사는 추가 검사를 권장하면서 '윈윈'처럼 착각하지만, 실제 건보 재정은 구멍 난 배처럼 새고 있다"며 포괄수가제 확대 또는 총액관리제 도입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총액 관리제는 매년 일정 금액을 정해 그 범위 안에서 지출하는 제도다. 유럽 등에서 건보 재정을 관리하기 위해 도입했다.
오주환 서울대 의대 교수는 "의사들이 과잉 검사를 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소송 대비와 고착된 의료 문화 때문"이라며 "검사를 하지 않으면 환자가 불안해 하는 현재의 의료 문화는 검사가 주 수익원이었던 구조가 오래 지속돼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오 교수는 "우리나라도 이제 국민 건강 수준, 의료비 관리, 환자 경험, 공급자의 서비스 질, 지역·계층 간 격차 개선 등을 함께 평가해 보상하는 '가치기반 의료(Value-Based Healthcare)'를 실험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미국의 이익공유제(MSSP)를 예로 들며, 비용 낭비 없이 의료 질을 달성할 수 있는 구조 실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이 제도를 도입한 2011년 이후 국민 보건의료비 지출이 GDP 대비 16% 대에서 더 이상 증가하지 않고 있다.
말기 암 환자에게 무의미한 항암 치료나 MRI·CT를 권하는 관행은 건보 재정 낭비의 대표 사례다.
이상이 제주대 교수는 "해외는 암 환자 절반이 호스피스를 선택한다. 호스피스 확대가 비용 절감과 존엄한 삶 모두에 도움된다"고 말했다.
유신혜 서울대병원 교수도 "환자에게 도움 되지 않는 의료를 공적 보험으로 부담시키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연명 치료를 줄이고 호스피스 강화에 재원을 투입해야 한다"고 했다.
◇약값 억제 필수…고가 희귀 의약품은 별도 기금으로
복제약(제네릭) 사용 확대도 필요하다. 현재 건보는 약 가격의 약 70%를 부담하고 있다. 대한약사회 '성분명 처방 모델 개발 연구'에 따르면 오리지널을 복제약으로 바꾸면 연간 약 7조9000억원, 건보 재정 5조5300억원을 아낄 수 있다.
정부는 성분명 처방을 검토하고 있으나, 무턱대고 급여를 확대하는 관행이 이어진다면, 재정 위기는 피할 수 없다.
호주나 영국처럼 고가 희귀 의약품은 별도 기금을 마련해 건보와 분리 관리하는 방안도 제시된다.
정지향 이대서울병원 신경과 교수(대한치매학회 이사)는 "신약 급여화는 환자에게 필요하지만 무턱대고 적용하긴 어렵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