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 사회가 지난해 12월부터 시작됐고, 만성질환은 빠르게 늘고 있다. 지금 의료체계로는 새로운 수요에 대응하기 어렵다."

보건복지부가 '지역사회 일차의료 혁신 시범사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요약하면 이번 시범사업은 병원 이용을 제한하는 주치의 제도가 아니라, 관리 중심의 1차 의료 체계를 만들어보겠다는 실험이다. 동네 의원 한 곳을 선택해 등록하면 병의 종류와 상태에 맞춰 꾸준히 관리받고, 정부는 진료 횟수가 아니라 관리 성과를 기준으로 의료기관에 보상한다. 상급병원 이용이 주치의로 제한되는 방식은 아니다.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는 모습./뉴스1

복지부는 23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해당 사업 초안을 보고하며 초고령화와 만성질환 증가, 대형병원 쏠림 현상이 동시에 심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상급종합병원의 중증·응급 중심 개편과 2차 병원 육성만으로는 의료 이용 구조를 바꾸기 어렵고, 전달체계의 출발점인 1차 의료 기능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정부가 제시한 해법은 '한국형 1차 의료 모델'이다. 박은정 복지부 지역의료혁신과장은 최근 기자들을 상대로 한 사전 설명회에서 "환자의 선택을 규제하는 구조는 아니다"며 "자율적으로 의원을 선택해 등록하고, 신뢰 관계를 기반으로 한 관리 체계가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검증하는 시범사업"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사업의 핵심은 환자를 같은 방식으로 진료하지 않겠다는 점이다. 등록 환자는 질환 수와 기능 상태, 돌봄 필요도에 따라 네 개 군으로 나뉜다. 비교적 건강한 주민은 예방과 생활습관 관리 중심으로, 고혈압·당뇨 등 만성질환자는 정기 모니터링과 약물 관리 중심으로, 복합 질환을 가진 고위험군은 밀착 관리한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는 방문·재택의료와 돌봄 서비스로 연계한다. 관리 강도와 보상 수준도 환자군에 따라 달라진다.

환자 분류는 데이터에 기반한다. 복지부는 건강보험 청구자료를 활용한 기존 연구와 시범사업 데이터를 병행 분석해 환자군별 적정 의료비와 관리 수준을 검증하겠다는 구상이다. 내년은 의료비가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는 50세 이상을 중심으로 시작하고, 이후 연령과 대상 범위를 단계적으로 넓힌다.

진료 방식은 '의사 1인 주치의'가 아니라 다학제 팀을 전제로 한다. 단독 개원이 많은 현실을 고려해 여러 의원을 지원하는 거점지원기관을 두고, 방문·재택의료와 다직종 협업을 뒷받침한다. 지역 여건에 따라 2차 병원 연계형, 지자체 주도형, 보건의료원 중심형 등 다양한 운영 모형을 동시에 실험한다.

보상체계도 바뀐다. 의원당 최대 1000명까지 환자를 등록해 관리하고, 환자 1인당 관리료를 매월 사전 지급하는 구조다. 여기에 운영 지원과 성과 보상이 더해진다. 성과 평가는 서비스 질과 건강 결과, 합리적 의료 이용 여부를 기준으로 한다. 다만 검사·처치 등 편차가 큰 영역은 당분간 행위별 수가를 병행한다. 환자 본인부담률은 20%로, 구체적인 납부 방식은 환자와 의원 간 동의를 통해 정할 계획이다.

복지부는 이번 시범사업을 기존 만성질환관리사업이나 방문진료 수가의 단순 확대가 아니라, 전 국민 주치의 논의를 위한 기초 설계 작업으로 규정하고 있다. 박 과장은 "환자군별 관리와 적정 의료비, 보상 구조가 먼저 정리돼야 제도화를 논의할 수 있다"며 "기존 사업과의 중복 여부도 평가를 거쳐 통폐합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범사업은 내년 7월 시작을 목표로 지역 공모와 예비 지정을 거쳐 추진된다. 정부는 2028년까지 데이터 축적과 평가를 통해 모델을 정립한 뒤, 2029년 이후 제도화 여부를 검토할 계획이다.

의료계는 방향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참여 유인을 충분히 설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난 17일 국회 토론회에서 이충형 대한의사협회 의무이사는 "과거 시범사업들은 설계는 좋았지만 참여 의원이 1%에도 못 미쳤다"며 "구조는 단순해야 하고, 재정 투입은 충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호계와 학계에서는 다학제 인력의 역할과 책임, 보상 구조를 보다 명확히 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