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수급을 둘러싼 논의가 '숫자' 앞에서 속도를 잃고 있다. 의대 정원 조정을 위해 미래에 필요한 의사 수를 추산 중인 의사인력 수급추계위원회(추계위)가 예정됐던 최종 결론 도출을 미루면서다. 추계위는 2040년 전국적으로 약 1만8000명의 의사가 부족할 수 있다는 추계를 내놓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김태현 의사인력 수급추계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8월 12일 오후 서울 중구 남대문로 T타워에서 열린 제1차 추계위 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뉴스1

◇2040년 의사 부족 전망, 尹 정부 증원 근거와 다시 겹쳐

추계위는 지난 22일 열린 11차 정례회의에서 2040년 의사 공급과 수요를 각각 추산한 여러 시나리오를 놓고 논의했으나 최종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당초 이날을 끝으로 추계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었지만, 위원들은 오는 30일 추가 회의를 열어 논의를 이어가기로 했다.

추계위는 현재 의대 정원(3058명)의 89.6%가 임상 현장에 진출하고, 65세 이상 의사의 최대 20%가 은퇴한다는 가정을 전제로 2040년 의사 공급 규모를 약 13만1498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의사 수요는 전체 의료 이용량과 국민 1인당 의료 이용량, 입원과 외래 진료의 가중치 등을 달리 적용한 여러 시나리오에 따라 최소 14만5993명에서 최대 15만237명 수준으로 제시됐다. 이를 종합하면 2040년 전국적으로 최소 1만4000명에서 많게는 1만8000명가량의 의사가 부족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만 위원들은 의사 수요를 산정하는 전제와 방법론을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특히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기술 발전을 변수로 얼마나 반영할지를 놓고 의견이 갈린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위원은 "향후 의료 환경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은 추계는 과도한 증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위원은 "AI가 아직 임상 현장에서 의사를 대체할 수준은 아니다"라며 반대 입장을 보였다.

이 같은 추계 결과는 과거 윤석열 정부가 제시했던 전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해 박민수 당시 보건복지부 2차관은 한국개발연구원(KDI),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서울대 연구 등을 근거로 "현 수준이 유지될 경우 2035년까지 의사가 약 1만5000명 부족하다"고 밝혔다.

정부는 이를 토대로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의료계는 근거의 신뢰성과 발표 방식에 반발했다. 이후 의사 인력 추계를 보다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논의하겠다며 추계위가 출범했지만, 다시 비슷한 규모의 숫자가 거론되면서 추계위 출범의 취지 자체가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가 나온다.

서울 시내 한 의과대학./연합뉴스

◇의료계 '증원 과다 우려' vs 복지부 '추계위는 범위만 제시'

의료계는 추계 방식 전반에 강한 불신을 드러낸다. 대한의사협회는 "추계위가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과학적 추계를 수행하기보다 핵심 변수와 방법론 논의 없이 결론 도출을 서두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인구 구조, 의료 전달체계 변화, 의료 접근성 등 주요 변수 검토가 부족한 상태에서 결과만 다급히 내놓는다는 지적이다.

의협은 또 "AI와 디지털 헬스케어 기술 발전이 추계에 반영되지 않았다"며 우려를 표했다. 기술 발전이 의사 생산성과 업무 구조를 바꾸고 있음에도, 추계위는 과거 의료 이용 패턴만으로 계산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협회는 "의사인력 수급 추계는 미래 의료 방향을 좌우하는 중요한 정책 근거인 만큼, 과정과 결과 모두 투명하고 과학적이어야 한다"며 "세미나 등을 통해 검증하고 국민에게 설명하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의료계는 추계위가 제시한 범위를 정부가 정책적으로 해석하면서, 실제 증원 규모가 지나치게 많아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정은경 복지부 장관은 지난 17일 한 라디오 방송에서 "추계위 결과를 정책적으로 판단해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에서 2027학년도 이후 의대 정원을 결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복지부는 논의 과정에서 일정 부분 거리를 두는 모습이다. 복지부 핵심 관계자는 "추계위는 전문가로 구성된 독립적 위원회로 운영되며, 복지부는 중간 보고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추계는 특정 숫자를 확정하는 작업이 아니라, 다양한 가정을 토대로 추정 범위를 제시하는 과정"이라며, 정부가 결론을 미리 정해 추계위를 움직인다는 일부 시각에도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