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 수혜자들에게 둘러싸여 마지막 헌혈을 하고 있는 제임스 해리슨. /적십자 호주 지부 '라이프블러드'

세계에서 가장 많은 혈액을 기증하고, 자신의 혈액에 들어있는 희귀 항체로 아기 240만명을 구한 호주 남성이 88세 나이로 별세했다.

3일(현지 시각) BBC와 호주 7뉴스 등에 따르면, 제임스 해리슨(James Harrison)은 지난달 17일 호주 뉴사우스웨일즈 센트럴 코스트의 한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호주에서 그의 별명은 '황금팔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생전 1173회에 달하는 혈장을 기증해 2005년 세계 최다 혈장 기증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2022년까지 유지됐다. 혈장 기증은 헌혈에서 혈액의 액체 성분인 혈장만 분리한다.

특히 해리슨의 혈장에는 신생아 용혈성 질환(HDFN) 예방에 필수적인 '항-D 항체(anti-D)'가 포함돼 240만명이 넘는 신생아의 생명을 구했다. HDFN는 임신 중 어머니와 태아의 적혈구가 맞지 않을 때 발생하는데, 어머니의 면역 체계가 태아의 혈액 세포를 공격하면서 심각한 빈혈, 심부전, 사망까지 초래할 수 있다. 해리슨의 항-D 항체는 HDFN 예방하는 약물 제조에 사용됐다.

해리슨은 18세이던 1954년부터 현혈을 시작해 81세가 되는 2018년까지 60년 넘게 2주 간격으로 헌혈을 이어갔다. 그는 14세 때 수술에서 수혈을 받은 후 헌혈을 결심했다고 한다. 해리슨의 혈액이 항-D 항체를 다량 보유하게 된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일부 보고서는 그가 14세 때 받은 대량 수혈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호주 적십자의 혈액기관인 '라이프블러드(Lifeblood)'에 따르면 호주에서는 해리슨처럼 200명이 채 되지 않는 항-D 항체 기증자가 매년 4만5000명에 달하는 산모와 아기의 생명을 살리고 있다. 라이프 블러드 측은 "제임스는 1173번이나 낯선 이들을 위해 팔을 내밀었고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며 "그는 놀라운 유산을 남겼고, 언젠가 호주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기부 기록을 깨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해리슨의 딸은 "아버지는 큰 비용을 들이거나 고통 없이 많은 생명을 구한 것을 자랑스러워하셨다"면서 "아버지는 항상 헌혈이 아프지 않다며 '네가 구한 생명이 바로 네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전했다.

항-D 항체의 수혜를 받은 레베카 인드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헌혈하는 일은 놀랍다고 생각한다"며 "해리슨은 우리 같은 평범한 가족이 건강한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평생을 바친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