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증원을 비롯한 의료 개혁은 윤석열 정부가 추진한 핵심 정책이다. 윤 정부는 전 국민의 70% 이상이 의대 정원 증원을 찬성한다는 여론 조사 결과를 앞세워 의대생을 연간 2000명씩 향후 5년간 1만명을 증원한다고 했다. 또 환자 생명과 직결되는 필수 의료 인력 부족과 지역 의료 격차를 해소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사태로 의대 증원을 비롯한 의료 개혁 정책은 좌초 위기에 처했다. 지방·필수의료 개혁 정책 패키지도 동력을 잃은 상태다. 각 지역 필수의료 중추 역할을 하는 주요 대학병원을 비롯한 3차 병원의 경영난과 인력난은 심화했다. 지난 1년간 해결된 것 하나 없이 정치·사회적 갈등과 분열만 키웠다는 비판이 나온다.
◇ 빅5병원 내년 전공의 대규모 미달… 인력 공백 심화
11일 보건복지부와 의료계에 따르면, 빅5병원(서울대·서울아산·세브란스·서울성모· 삼성서울병원)을 비롯한 전국 114개 수련병원의 내년도 상반기(전기) 레지던트 1년 차 모집 지원율은 단 8.7%(314명)에 그쳤다.
이대로라면 내년 전국 주요 병원의 인력 공백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통상 전국 병원은 레지던트 1년 차 모집 총정원 3300명대 수준에 2700명 규모로 매년 선발해 왔는데, 대규모 미달이 난 것이다. 복지부에 따르면 2022년도 전기 레지던트 1년 차 확보율은 79.7%, 2023년도는 82.1%, 2024년도는 83.2%였다.
이미 지난 2월 의대 증원 정책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병원을 집단 이탈해 의료 공백이 커져 있다. 8월 말 집계 기준 사직 전공의는 1만1732명이었다. 전공의만 떠난 게 아니다. 전임의(펠로)들도 줄퇴사했다. 전임의는 전문의가 된 후 수련병원에서 1~2년 세부 전공을 공부하며 진료하는 의사다. 이 공백을 정년 퇴직을 앞둔 교수를 비롯한 남은 의료진들이 당직을 서며 1년 가까이 막아 왔다. 이 의료진들은 업무 과부하와 극도의 피로(번아웃)를 겪고 있다.
이런 의료 공백의 여파는 결국 환자에게 돌아온다. 응급 환자가 응급실을 찾아 헤매는 문제는 계속 부각되고 있다. 전공의 미달 사태는 곧 미래 의료를 책임질 의료인 교육과 전문의 양성에 모두 빨간불이 켜진 것을 의미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병원 교수는 "이대로라면 미래의 환자들은 좋은 의사와 교수를 만나기 어렵다"고 했다.
의대생의 현역 입대가 증가하면서 지역 공공 의료를 뒷받침했던 공중보건의사(공보의)·군의관 부족도 부각되고 있다. 현역 입대한 의대생은 이미 지난 8월에 1000명이 넘었다. 공보의협의회는 지난 10일 호소문을 통해 "전공의 입대가 시작되고 나면, 군 의료자원은 더 이상 없다"며 "정치와 선거용으로 만들어낸 의료 공백이 아니라 실재하는 '진짜 의료 공백'이 올 것"이라고 했다.
◇ 의료계 "수련 환경 개선·필수의료 살리기 계속"
남은 과제는 의정 갈등으로 엉킨 실타래를 하루 빨리 풀어 의료 현장의 혼란과 환자 피해를 해소하는 것이다. 의료계에선 의대 증원 정책과 의료계 당면 과제를 분리해 해법을 논의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의대생과 대한의사협회 등은 정부가 당장 내년도 의대 모집부터 전면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의학계에선 사회 갈등과 입시 혼란을 고려해 '2026년 동결'이 현실적이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진우 대한의학회장은 "각 의대 합격자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2025년 의대 모집을 중단하고 증원을 백지화하라'는 주장은 국민의 공감, 사회적 합의를 얻기 어렵다"며 "2026년 의대 정원을 종전 수준으로 동결하고 2027년부터는 추계 기구의 결론을 반영하는 방향이 되도록 의료계가 힘을 모아야 한다"고 의견을 냈다.
정치권이 전공의 수련 환경과 필수의료 개혁 대책을 계속 이행해 나가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 의학회장은 "올바른 의료 개혁을 통해 의료 제도와 수련 환경을 잘 만들어야 한다"며 거대한 정치 이슈로 의정 갈등과 의료 개혁 문제가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커 우려스럽다"고 했다.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장(일산백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은 "의대 증원 발표가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의 도화선이 된 건 사실이지만, 전공의 수련 제도는 원래 위기였다"면서 "의대 증원을 백지화한다고 해도 떠난 이들이 100%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전공의들이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환경과 기회를 마련해줘야 한다"며 수련 교육 환경 시스템이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필수 의료 개혁은 가장 중요한 과제"라며 "의사단체와 의료개혁특위가 함께 논의하면 문제를 정책적으로 풀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필수의료를 뒷받침할 시스템을 마련하고 처우 개선과 함께 의료사고 분쟁에 대한 안전망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전날 야당이 일방 삭감한 '감액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내년도 보건복지부 예산에 포함된 인턴, 레지던트 등 전공의 지원 예산도 정부안 대비 931억 1200만원 삭감됐다. 감액 예산 항목 중 삭감 규모가 가장 크다.
또 지난 8월 말,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가 필수·지역의료에 5년 동안 국가재정 10조원과 건강보험 10조원을 함께 투자해 세부 정책 과제를 추진할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현재로선 계획대로 실행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이 중엔 응급, 심뇌, 분만, 중증 소아 등 고위험 필수의료 영역에서 최선을 다한 진료 행위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의료사고 형사 특례 법제화' 추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