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서울 종로구 하이 본사에서 만난 김진우 대표는 “한국은 디지털치료제를 개발, 상용화하기에 좋은 환경”이라며 “우수한 정보통신(IT)기술과 헬스 기술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이정아 기자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는 지난해부터 자금까지 국산 디지털치료제 4종을 승인했다. 에임메드의 불면증 인지개선 치료제 ‘솜즈’, 웰트의 불면증 인지개선 치료제 ‘웰트아이(현재 상품명 슬립큐)’, 뉴냅스의 뇌졸중 환자 시야장애 개선 치료제 ‘비비드브레인’, 쉐어앤서비스의 호흡 재활 운동 치료제 ‘이지브리드’다. 그 뒤를 이어 국산 5호에 도전하는 치료제가 있다. 국내 업체 하이(Haii)가 개발한 범불안장애 디지털치료제 ‘엥자이렉스’다. 하이는 김진우 연세대 디지털치료연구센터장이 2016년 12월에 창업했다.

먹는 알약이나 주사 대신 소프트웨어 기반으로 질병을 예방하고 관리, 치료하는 디지털치료제가 뜨고 있다. 디지털치료제는 신약과 마찬가지로 임상시험(탐색·확증)을 거쳐 치료 효과를 입증해야 식약처 승인을 받을 수 있다. 그러면 환자는 의사 처방을 받아 디지털치료제를 쓸 수 있다.

하이는 엥자이렉스 외에도 인지장애나 근감소증 등을 진단, 치료, 예방할 수 있는 디지털치료제 후보를 5종이나 갖고 있다. 이 중 엥자이렉스는 기존 신약으로 치면 임상 2~3상 단계인 확증임상시험을 마치고 식약처에 품목허가를 신청한 상태다. 다른 후보들도 확증임상을 진행 중이거나 앞두고 있다.

21일 서울 종로구 하이 본사에서 만난 김진우 대표는 “한국은 디지털치료제를 개발, 상용화하기에 좋은 환경”이라며 “우수한 정보통신(ICT)기술과 헬스 기술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 강점 덕분에 국산 디지털치료제가 세계 시장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음은 김진우 대표와의 일문일답.

–한국은 디지털치료제 상용화에 어떤 환경인가.

“매우 좋은 환경이다. ICT와 의료 기술이 세계 탑(top·정상)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하기 때문이다. 또한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대중의 수용도도 최고다. 가령 우리가 전남 순천에서 치매 디지털치료제인 알츠가드를 고령자를 대상으로 10주간 시범사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60% 이상이 마지막주 끝까지 제품을 사용했다. 반면 미국 맥킨지&컴퍼니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디지털치료제를 한 달 동안 계속 쓰는 순응도가 10% 미만이다. 그만큼 한국인들은 디지털치료제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

–데이터 수집도 한국이 유리하다고 들었다.

“한국은 AI를 개발할 때 필요한 빅데이터(대용량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이 미국보다 빠르고 저렴하다. 한국인은 대부분이 스마트폰은 물론 스마트워치 같은 웨어러블(wearable·착용형) 기기를 사용하고 있지 않는가. 한국에서 AI 모델을 만들어서 미국 환자들에 접목하면 단기간에 정확하고 경제적인 디지털치료제 제품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장점들 덕분에 국산 디지털치료제들이 해외에 나갔을 때 경쟁력이 크고, 결국 세계 시장을 선도하리라고 본다.”

하이가 개발한 엥자이렉스 화면./하이

–하이를 설립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지난 30년간 인간-컴퓨터 상호작용(HCI) 기술을 연구 개발하면서 어떻게 하면 일상생활에 활용할 수 있을까 고민해왔다. 2010년대 후반부터 인공지능(AI)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HCI 기술이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AI 기술을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데 개발하고 싶다는 생각에 2016년 하이를 창립했다. 회사 이름 하이도 휴먼(Human), AI(ai), 상호작용(Interaction)에서 글자를 따왔다.”

–원래는 의료와 관계 없는 분야를 연구했다고 들었다.

“창업 초기에는 값비싼 센서를 대체하는 합성센서와 로봇을 개발했다. 그러다가 2018년부터 헬스케어로 눈을 돌렸다. 아무래도 AI 기술이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은 의료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대목동병원 연구진과 함께 고령임에도 인지기능이 중장년층 정도인 일명 수퍼에이저(super ager)에 대한 연구를 했다. 이들이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일반 노인들이 슈퍼에이저처럼 인지기능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등을 연구했다. 이를 토대로 인스턴트 메신저인 카카오톡을 기반으로 고령자의 인지기능을 향상시키는 시스템(세미톡)을 만들었다. 현재 한국에자이에 기술이전해 상품화한 상태다.”

–엥자이렉스는 어떤 질환을 치료하나.

“불안(anxiety)과 진정(relax), 두 단어를 합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범불안장애를 치료하는 디지털치료제다. 지난 7월 확증임상을 마치고 9월 식약처에 인허가를 신청했다. 범불안장애는 불안장애의 하나로, 어떤 사건이나 활동에 대해 과도하고 통제 불가능하게 걱정하는 질환이다. 걱정이 너무 지나치면 수면장애, 기력소진, 신경과민, 긴장 등이 발생해 일상생활에 악영향을 미친다.”

–휴대폰만으로도 엥자이렉스를 쓸 수 있다고 들었다.

“맞는다. 휴대폰만으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엥자이렉스의 기본적인 치료 원리는 이미 진료에 활용하는 ‘자기조절이론’과 ‘수용전념치료’다. 자기조절이론은 자신의 사고와 행동, 감정을 조절하는 과정을 거쳐 자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심리적, 행동적인 통제를 말한다. 수용전념치료는 자기 스스로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상담법을 말한다.

쉽게 말해 엥자이렉스는 자신의 정서에 맞는 긍정적인 말들을 쭉 읽고 다시 자기 목소리로 듣는 것을 하루에 두 번씩 반복해 불안장애로부터 벗어나는 원리다. 녹음된 목소리는 내가 말할 때 듣는 목소리와는 달라 낯설다. 엥자이렉스는 AI 기술을 이용해 환자가 듣는 목소리와 흡사하게 변조한다. 내 목소리로 긍정적인 말을 듣는 마인트컨트롤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의학적으로는 감정을 처리하는 뇌 영역인 편도체가 과도하게 활성화한 것을 낮춰주는 효과가 있다.”

김진우 대표는 AI 기술을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데 개발하고 싶다는 생각에 2016년 하이를 창립했다. 21일 김 대표가 종로구 본사에서 가리키는 회사 이름 하이(Haii)도 휴먼(Human), AI(ai), 상호작용(Interaction)에서 글자를 따왔다./이정아 기자

–최근 확증임상을 마쳤다. 효과는 어떠했나.

“강남세브란스 김재진 정신건강의학과 교수팀과 함께 엥자이렉스에 대한 확증임상을 진행했다. 임상을 원하는 2034명을 모아 이중 96명을 선별해 확증임상을 진행했다. 두 그룹으로 나눠 10주간 한 그룹은 기존 불안장애 치료만 받게 하고, 다른 한 그룹은 치료와 함께 엥자이렉스를 사용하게 했다. 그 결과 불안척도와 범불안장애척도, 불안과 우울 점수,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개발한 걱정도 설문 등 5가지 검사에서 모두 치료 효과를 입증했다. 기존 약물치료만 받을 때보다 엥자이렉스를 병행했을 때 증상이 매우 빠르게 호전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다른 범불안장애 디지털치료제도 있나.

“우울증과 달리 범불안장애 쪽에서는 아직 디지털치료제가 거의 개발되지 않은 것 같다. 엥자이렉스가 세계에서는 첫 번째 사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범불안장애 유병률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높다. 향후 엥자이렉스가 디지털 바이오마커(생체지표)를 측정해 그 결과에 따라 맞춤형 치료를 제공하는 방법도 기획 중이다. 시장에서 데이터가 많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욱 정확하고 치료 효율도 높아질 것이다.”

–디지털 바이오마커란 무엇인가.

“혈당 수치를 재 당뇨병을 진단하는 것처럼 범불안장애를 진단하는 데 필요한 데이터를 말한다. 스마트 기기로 사람들의 질환과 관련된 생물학적 변화나, 행동·정신적 요소들을 수집해 특정 질환에 대한 진단이나 치료나 모니터링, 예방 용도로 활용한다.

예를 들어 하이가 개발한 ‘마음첵(Mind Check)’ 서비스는 스마트폰 카메라에 얼굴을 비춰 디지털 바이오마커를 수집한다. 얼굴 색의 미묘한 변화를 수집해 심박수와 심박변이도를 측정한다. 화장한 얼굴이나 까무잡잡한 피부도 측정 가능하다. 지금까지 약 16만명의 데이터를 모았다.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를 알아보는 기존 앱(app·응용프로그램)은 대개 여러 개 문항에 답하는 형식이다. 설문 응답만 갖고서는 완벽한 진단을 내리기가 힘들다. 사람에 따라 자기 마음을 속시원히 얘기하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다. 하지만 마음첵은 디지털바이오마커 데이터를 활용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불안함과 스트레스를 측정할 수 있다.”

하이가 개발한 ‘마음첵(Mind Check)’ 서비스는 스마트폰 카메라에 얼굴을 비춰 디지털바이오마커를 수집한다./하이

–다른 디지털치료제 후보도 디지털바이오마커를 활용하나.

“그렇다. 하이는 자체 또는 협업 개발한 디지털바 이오마커를 21종 갖고 있다. 가령 현재 확증임상 중인 인지장애 진단 디지털치료제인 ‘알츠가드’는 아이트랙킹(시선추적)으로 디지털 바이오마커를 수집한다. 화면에서 까만 점이 곡선을 따라 움직이는데, 인지장애가 있는 사람일수록 아이트랙킹이 복잡하고 느리다. 디지털바이오마커를 활용하면 설문 문답만으로는 잡아내지 못하는 미세한 부분들까지도 포착할 수 있다. 병원에서 고가의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을 하지 않고도 스마트폰만으로 인지장애 여부를 알아볼 수 있다.”

–해외시장으로 진출할 계획도 있나.

“미국에서 하버드 의대 자살방지센터와 함께 임상시험을 기획 중이다. 그곳에도 당사와 비슷한 제품이 있는데,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재시도 위험을 측정하는 모델이다. 우리는 마음첵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위험도를 측정하는 기능을 넣어 연구하고 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진단과 비교했을 때 정확도가 94%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