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챗GPT 달리3

[편집자 주] 세계 시장에서 한국 기업이 1등을 하는 산업 분야는 없다. 반도체 분야는 선두권 경쟁에서 밀려 위기감이 커졌고, 제2의 반도체라 불리는 제약·바이오 분야는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정보과학(ICT) 기술과 의학을 접목한 디지털치료제 사업은 국내 기업이 글로벌 선두권에 설 수 있는 분야로 꼽힌다. 디지털치료제 시장과 산업이 태동 단계에 있고, 아직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기업도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치료제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의 성장 기회와 산업 육성을 위한 조건을 짚어봤다.

뇌졸중 환자 A씨는 눈에 직접적인 문제는 없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뇌의 시각 담당 영역이 손상된 탓이다. 책을 읽는 것은 물론 걷거나 음식을 먹는 일상생활도 어려운 수준이다. 하지만 직접 치료하는 약물은 없다. 강동화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교수는 앞이 보이지 않는 뇌졸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가상현실(VR) 기술과 모바일 앱(app·응용프로그램)으로 시각 기능을 회복할 수 있는 디지털치료제 ‘비비드브레인’을 개발했다. 환자가 처방 받아 12주 동안 사용한 결과, 시야 장애 증상이 눈에 띄게 개선됐다.

디지털치료제는 먹는 알약이나 주사 대신 소프트웨어 기반으로 질병을 예방·관리·치료하는 기술로, 1세대 화학합성 치료제, 2세대 바이오 치료제에 이어 3세대 치료제로 주목받고 있다. 고령화 추세에 만성질환 환자가 증가하고 있어 병원에서 치료하는 것을 넘어 일상생활에서 건강을 예방, 관리하려는 수요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지난 7월 발표한 ‘글로벌 보건산업 동향’에 따르면 시장분석 기업들은 디지털치료제 시장의 성장률을 지금부터 2028~2032년까지 연평균 16~31.5%로 전망했다. 2032년 약 143조원 규모로 성장한다는 예측도 있다.

한국은 세계 시장보다 성장 속도가 빠르다. 지난해 삼정KPMG 경제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디지털치료제 시장 규모는 2019년 29억달러(한화 약 3조 9669억원)에서 2025년 89억달러(12조 1707억원)로 연평균 20.5%의 성장률로 성장할 전망이다. 국내 디지털치료제 시장은 2019년 1245억원에서 2025년 5288억원으로 연평균 27.2%의 성장률로 커질 것으로 예측된다. 내수를 넘어 해외 시장으로 가면 규모가 더 커진다. K 디지털치료제가 세계 시장을 선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3세대 치료제로 부상한 디지털치료제

디지털치료제가 잇따라 나오며 의료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시기에 디지털 전환 속도가 빨라지면서 디지털치료제 사업 가치가 부각됐다. 디지털치료제는 2020년 이후 3년 연속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전시회 CES에서 핵심 기술 키워드로 선정됐다.

디지털치료제를 가장 먼저 내놓은 곳은 미국이다. 2010년 당뇨병 관리업체 웰닥이 제2형 당뇨병 관리 모바일앱 ‘블루스타’를 시판하며 처음 디지털치료제(Digital Theraprutics)라는 말을 썼다. 이후 2017년 8월 페어테라퓨틱스가 개발한 약물 중독 치료용 모바일앱(리셋·reSET)이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았다.

스타트업들이 일찍이 디지털치료제 사업에 도전한 미국이 글로벌 시장의 약 40% 점유율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 국가의 디지털치료제 시장 성장 속도가 연평균 113%로, 유럽 90.4% 북미 75.2%보다 더 빠르다. 특히 한국은 우수한 IT 기술과 의료 역량을 갖추고 있어 충분히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디지털치료제가 미국에서 먼저 나왔지만, 미국이 세계 디지털 치료제 시장을 선도한다고 보기 어렵다.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회사나 괄목할만한 성공 사례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2017년 처음으로 디지털치료제 FDA 허가를 받은 페어테라퓨틱스는 지난해 3월 파산해 상장 폐지됐다. 세계 첫 제2형 당뇨병 디지털치료제로 FDA 허가를 받은 베터테라퓨틱스도 파산 절차를 밟고 있다. 미국도 디지털치료제 시장 환경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탓이다.

그래픽=정서희

◇한국은 시장 진입 늦었지만 경쟁력 충분

한국은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은 디지털치료제들이 속속 등장했다. 미국보다 디지털치료제 시장에 늦게 뛰어든 편이지만, 한국이 의료와 IT에 세계적 경쟁력이 있고 정부도 시장 성장을 위해 규제 완화 정책을 펼쳐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선경 한국형 ARPA-H(보건의료고등연구계획국) 추진단장은 “한국은 이미 우수한 IT와 의학 역량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서의 성장 잠재력이 크다”며 “첨단 기술과 의료를 융합해 보건의료계의 난제와 위기를 해결하려는 혁신과 도전을 뒷받침해줄 제도와 문화를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디지털치료제는 기존 의약품처럼 임상시험을 거쳐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디지털치료제 4종이 허가를 받았다. 에임메드의 불면증 인지개선 치료제 ‘솜즈’, 웰트의 불면증 인지개선 치료제 ‘웰트아이(현재 상품명 슬립큐)’, 뉴냅스의 뇌졸중 환자 시야장애 개선 치료제 비비드브레인, 쉐어앤서비스의 호흡 재활 운동 치료제 ‘이지브리드’다.

국내 디지털치료제 업체들은 처음부터 해외 시장을 동시에 공략하는 전략을 펼쳤다. 슬립큐를 개발한 강성지 웰트 대표는 “실제 의료 현장에서 슬립큐의 불면증 치료 이점과 필요성을 지속해서 검증하는 한편, 글로벌 시장 진출 속도도 높일 것”이라며 “지난 7월 독일 뮌헨에 독일 지사를 설립해, 임상시험과 파트너십 추진 등 유럽 시장 현지화 계획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국내 제약사 한독(002390)은 웰트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전략적 투자자(SI)로 참여해 사업 파트너로 협업 중이다.

식약처와 업계 취재 결과, 올해 하이를 비롯한 국내 기업 3곳이 식약처에 승인 신청을 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에 비춰 조만간 국산 디지털치료제 5호가 나올 전망이다. 식약처 관계자는 “제품의 개발부터 임상시험 설계까지 밀착 지원하고, 과학적이고 철저한 심사를 거쳐 허가를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강동화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교수가 시야장애를 앓고 있는 뇌졸중 환자에게 디지털치료제 ‘비비드브레인’을 통한 시지각 학습 방법과 치료 효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서울아산병원

◇기술수출 첫 성공…출시 속도 높이려 규제도 완화

국내 디지털치료제 허가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식약처에 따르면 지난 15일 기준 ‘디지털치료제 소프트웨어(재활 목적 포함)’ 임상시험 계획 승인 건수는 54건, 진단·보조·분석 평가용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소프트웨어 의료기기’ 임상시험계획 승인 건수는 누적 195건으로 집계됐다. 지난 2018년 6건에 그쳤던 디지털 치료 소프트웨어 임상시험 계획 승인이 매년 증가한 것이다.

기술수출 사례도 올해 처음 나왔다. 에스알파테라퓨틱스는 지난 4월 소아 근시 파이프라인 ‘SAT-001′ 기술을 일본 로토제약에 이전했다. SAT-001은 앱 게임을 통해 소아 근시 진행을 억제하는 디지털치료제 임상시험 승인을 국내 최초로 받은 제품이다.

식약처도 제도 환경을 조성하며 신사업에 힘을 싣고 있다. 아직 세계적으로 디지털치료제 제도 환경이 조성돼 있지 않는 만큼, 한국의 제도를 글로벌 기준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식약처는 2022년 10월부터 제품의 혁신성과 임상적 유효성 등을 평가·인정해 혁신 의료기기로 지정하는 ‘혁신 의료기기 통합심사·평가 제도’를 시행 중이다.

혁신 의료기기로 지정되면 의료 현장에서 3∼5년간 임상 연구를 진행한 후 신의료기술평가를 진행할 수 있다. 원래 의료기기는 식약처 허가를 받고도 신의료기술평가를 거쳐야 수가(보험이 정한 진료비)가 정해진다. 디지털치료제는 실제 의료 현장에서 먼저 사용될 수 있도록 신의료기술평가를 유예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