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영 스타 마이클 펠프스와 앨리슨 슈미트는 지난달 25일(현지 시각) 미 하원에서 열린 한 청문회에 참석해 분통을 터뜨렸다. 세계반도핑기구(WADA)가 도핑 의혹을 받은 중국 선수들의 출전을 눈감아 줬다고 증언했다. 도핑은 경기 성적을 높이기 위해 금지 약물을 복용하거나 주사하는 행동을 말한다. 펠프스는 최근 중국 수영선수 23명이 금지 심장 약물에 양성반응을 보였는데도 WADA가 대회 출전을 허용해 그중 5명이 메달을 땄다고 비판했다.
스포츠 경기에서 국가 간 경쟁과 선수들의 승부욕이 과열되면서 도핑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점차 정교해지는 도핑 기술을 추적하는 과학기술도 함께 진화하고 있다. 국내에선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도핑콘트롤센터가 그 중심지이다. 국가대표 선수들은 모두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에 도핑 검사를 받는다. 지난달 25일 서울 성북구 KIST에서 만난 손정현 KIST도핑콘트롤센터장은 “평소 국내외 스포츠 경기장에서 보내온 선수들의 소변과 혈액 시료를 하루 30~40건 처리하고 있다”며 “7월 26일 개막하는 파리올림픽을 앞두고 더욱 바빠졌다”고 말했다.
KIST도핑컨트롤센터는 올림픽이 열리지 않을 때도 연간 7000건이 넘는 검사를 하고 있다. 국가반도핑기구에 해당하는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는 국내 주요 경기를 마친 선수들 가운데 수상자들과 임의로 선정된 선수의 소변과 혈액을 채취해 금지약물 복용 여부를 검사한다. 통상 규모가 큰 대회의 경우 약 10%의 선수들을 무작위로 뽑는다.
◇검사대상 무작위 선정, 7자리 암호로 관리
도핑 검사는 경기장에서 시작한다. 먼저 경기가 끝나면 도핑검사관이나 ‘샤프롱’으로 불리는 도핑관리 자원봉사자가 각각 검사 대상이 된 선수들을 찾아간다. 미성년 선수나 외국인 선수도 예외는 없다. 선수들이 경기장에 마련된 ‘도핑관리실’에 도착하면 도핑검사관의 감독 아래 소변과 혈액을 채취한다. 종합 비타민 약을 많이 먹으면 소변 색이 진하게 바뀌듯 소변은 몸에 들어온 화학 성분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리트머스 용지 역할을 한다.
마라톤과 수영처럼 지구력이 필요한 종목은 혈액을 뽑기도 한다. 이들 종목은 혈액의 산소운반 능력을 늘리는 것이 유리한데 헤모글로빈을 주입해 지구력을 끌어올리는 혈액 도핑을 하는 사례가 있다. 혈채취한 시료에는 선수의 이름과 소속 대신 7자리 숫자로 된 암호 표식을 매긴 뒤 센터로 보낸다. 손 센터장은 “선수의 도핑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져도 시료병만 보면 채취된 시료가 누구의 것인지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센터는 같은 선수의 시료 두 개 중 하나는 도핑검사를 위해 냉장 보관하고, 나머지 한 개는 섭씨 영하 20도에서 냉동 보관된다. 냉동 시료는 선수나 부모가 양성 판정에 불복하면 선수가 입회한 가운데 재검증할 때 쓴다. 검사에는 극미량 성분도 찾아내는 각종 질량분석기와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 장비 등 다양한 장비가 동원된다. 근육 강화 효과가 있는 스테로이드계 약물은 시료 성분의 탄소가 몸에서 나온 것인지, 외부에서 주입된 것인지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을 통해 알아낸다.
손 센터장은 “베이직 메뉴라고 불리는 기본 검사만 거쳐도 웬만한 약물과 대사체는 거의 다 파악된다”고 말했다. 종목에 따라서 추가 항목 검사가 따라 붙는다. 적혈구생성인자로 불리는 조혈제인 에리스로포이에틴(EPO)은 원래는 골수에서 적혈구 생성을 촉진하는 물질인데 경기력 향상을 노린 일부 선수들이 오용하고 있다. 한때 사이클 영웅으로 추앙 받던 랜스 암스트롱이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에서 연속 7회 우승할 때 복용한 것으로 밝혀져 큰 충격을 준 약물이다.
◇고대에도 있었던 도핑, 금지 성분 800종
도핑의 역사는 스포츠 역사만큼 뿌리가 깊다. 그리스인들은 고대 올림픽 경기를 앞두고 경기력이 향상된다며 무화과와 버섯을 먹었다. 술과 아편이 이용되던 시기도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약물 복용의 심각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인지하기 시작한 건 한참 뒤이다. 지난 1960년 이탈리아 로마 올림픽에서 덴마크 사이클 선수 크루느 에네마르크 옌센이 각성제인 암페타민을 과다 복용해 경기 중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IOC와 각 경기 연맹은 이를 계기로 약물 복용을 금지하기 시작했고 1968년 프랑스 그르노블 동계올림픽부터 약물 검사를 공식화했다.
올해로 설립 40주년을 맞은 KIST도핑컨트롤센터는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에 대비해 설립됐다. 지난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2019년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를 거치며 세계 5대 주요 스포츠 이벤트를 모두 경험했다. 센터는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올림픽 최악의 사건으로 손꼽히는 캐나다 육상선수 벤 존슨의 금지 약물 복용 사실을 적발한 것도 이곳이다. 센터는 지난 2021년 도쿄 올림픽에 이어 이번 파리올림픽에도 전문 인력을 파견한다.
센터는 1999년 WADA가 발족한 뒤 매년 공인 시험을 받는다. WADA는 도핑 검사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매년 전 세계 도핑연구실을 불시에 검증한다. 한 나라의 스포츠 과학과 분석 과학의 수준을 평가하는 국제대회나 다름 없다. 공인 시험은 무척 까다롭다. 정기적으로 1년에 3차례 보는데 한 번에 5건의 시료병이 전달된다. 검사 결과를 하나라도 잘못 내거나 보고 시한을 못 맞추면 탈락이다. WADA의 엄격한 관리로 지난 2014년 32개국 35개이던 전 세계 도핑랩은 올해 7월 현재 27개국 30개에 머물고 있다.
WADA는 매년 금지 약물 목록을 새롭게 업데이트한다. 처음 100여 종이던 금지 약물 수는 이제는 400가지가 넘는다. 약물의 대사체까지 포함하면 800종까지 늘어난다. 사실 금지약물은 대부분 치료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다. WADA도 이런 이유로 항상 금지하는 약물, 경기 때만 금지하는 약물로 나누고 있다. 고혈압과 심부전 치료에 사용하는 베타차단제는 집중력을 요하는 골프나 사격, 스키 종목에서 금지약물인 것처럼 특정 종목만 금지하는 약물도 있다.
일부 약물은 논란이 있다.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는 몸에서 혈류량을 증가시켜 지구력이나 순간적인 폭발력이 끌어올리는 데 유리하다. 신경안정제인 벤조디아제핀도 불면증을 극복하고 피로에서 빨리 회복하는 효과가 있다. WADA는 비아그라와 벤조디아제핀을 금지 약물에 포함하지 않고 있다. 반대로 한약재와 건강기능식품은 금지된다. 선수들이 감기에 걸리거나 보양을 위해 먹는 한약 가운데 마황과 녹용은 금지 약물인 흥분제나 스테로이드와 성분이 같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몽골 선수들도 잘못 먹었다가 검사에 걸리는 사례가 많다.
◇유전자 도핑, 뇌 도핑도 검출 가능
스테로이드는 금지약물 부동의 1위를 차지한다. 암시장에서 유통되는 ‘디자이너 스테로이드’는 큰 골칫거리다. 기존 스테로이드계 약물 성분을 약간만 바꿔 기존 검사를 요리조리 쉽게 빠져나간다. 손 센터장은 “이런 약물들은 한결같이 경기 능력 향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선수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도핑 디자이너들은 몸 안에 존재하는 단백질과 유사하고 대사되는 양이 적어 기존 분석법으로 검출하기 어려운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를 사용하곤 한다. 운동 능력이 필요한 시점에 약효만 나타나고 검사 시점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법이다. 도핑컨트롤센터는 몸에 남아 있는 미량의 장기 대사체를 검출해 한 달 전 약물 복용 사실까지 알아내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신개념 도핑을 검출하는 기술도 개발했다. 유전자 도핑은 스포츠 능력과 관련된 유전자의 결함과 결핍을 보완해 근육을 강화하고 근섬유 재생 능력과 회복력을 끌어올리는 기술이다. 가령 적혈구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유전자를 도핑하면 몸에 원래 있던 유전자와 도핑된 유전자를 구별하기 어렵다. 센터는 유전자 편집 기술인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Crispr-Cas9)로 외부에서 주입한 유전자에만 꼬리표를 붙이는 기술을 개발했다.
최근 약물 대신 뇌를 전기로 자극해 운동 능력을 높이는 뇌 도핑도 논란이 됐다. KIST 연구진은 뇌에 전기 자극을 줬을 때 소변으로 나오는 신경전달 물질로 뇌도핑을 검출하는 방법도 최초로 개발했다. 뇌 도핑은 부작용이 발견되면서 WADA도 검사 방법을 찾고 있다.
손 센터장은 “국가 간 경쟁과 선수들의 승리욕이 과열되면서 도핑은 더욱 조직화하고 지능화하는 추세”라며 “건조혈액반점(DBS) 검사방법처럼 이제는 도핑검사를 좀 더 값싸고 대규모로 진행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DBS는 별다른 냉동 장비 없이 선수에게서 채취한 혈액 몇 방울로 검사하는 기술이다. 센터는 코로나19 신속진단 키트 기술을 응용해 현장에서 간편하게 도핑 여부를 검사하는 신속진단키트와 이동형 분석 시스템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