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농장에서 소가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H5N1)에 감염되는 사례가 늘어남에 따라 국가들은 이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퍼질 위험에 대비하고 있다./pixabay

미국 농장에서 소가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H5N1)에 감염되는 사례가 늘어남에 따라 국가들은 이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퍼질 위험에 대비하고 있다. 일부 부유한 국가들이 바이러스 전파를 감시하고 있으며 백신을 구매하거나 새로운 백신을 개발하고 있다. 반면 저소득 국가들은 전혀 대비를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는 지금까지 미국 12개주에서 소 145마리와 사람 4명이 H5N1에 감염됐다며, 앞으로 인간 사이에서 대유행이 일어날 위험이 있다고 12일(현지 시각) 밝혔다.

H5N1는 주로 조류를 감염시키는 인플루엔자(독감) 바이러스로, 표면에 있는 헤마글루티닌(HA)과 뉴라미니디아제(NA)가 각각 5형, 1형이다. HA는 바이러스가 인체 세포에 달라붙는 열쇠 역할을 하며, NA는 증식 후 인체 세포를 뚫고 나오게 해준다. 바이러스는 숙주를 여럿 감염시키며 두 단백질의 형태를 바꾸는 쪽으로 진화한다. H5는 헤마글루티닌 중에서도 H5형을 뜻한다.

미국에서 소에게 H5N1가 옮은 사람들은 모두 농장 근로자다. 오염된 소젖을 짜다가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스콧 헨슬리(Scott Hensley)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면역학연구소 교수는 “현재는 H5N1이 대유행을 일으킬 징조가 보이지는 않는다”면서도 “하지만 인플루엔자바이러스는 단 하나의 돌연변이로도 특성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고 우려했다. 앤젤라 라스무센(Angela Rasmussen) 캐나다 새스캐처원대 백신·감염병기구 박사는 “앞으로 H5N1이 인간에게 전파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 날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연구자들이 H5N1에 대해 걱정하는 이유는 호흡기 질환이기 때문이다. 소에게서는 소젖을 접촉해 전염됐더라도 인간끼리는 호흡기를 통해 전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진화한 바이러스가 호흡기를 통해 소에서 사람으로 전해질 위험도 있다.

연구자들은 바이러스가 어떻게 전파되고 얼마나 많은 소와 사람을 감염시키고 있는지 감시하는 한편, 예측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다. 미셸 윌리(Michelle Wille) 호주 멜버른대 미생물학·면역학과병원체유전체학센터 선임연구원은 “여러 국가들이 이미 국제적으로 H5N1 전파를 막기 위한 계획을 세워 대비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H5N1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입자를 현미경으로 관찰한 사진(주황색)./CDC, 미국국립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NIAID)

H5N1 대유행이 일어나지 않게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백신이다. 만약 백신을 맞은 사람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더라도 일부 면역효과 덕분에 중증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지난 5월 세계보건기구(WHO)는 인플루엔자(독감) 백신 가운데 H5N1에 대한 면역효과가 있는 것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일부 백신이 H5N1에 효과가 있음을 확인했다. 마리아 반케르코브(Maria Van Kerkhove) WHO 전염병·대유행대비·예방 책임자는 “현재 H5N1이 당장 대유행을 일으킬 위험은 낮지만, WHO는 잠재적인 대유행에 끊임없이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위원회는 지난달 영국 독감백신제조사인 CSL 시퀴러스의 백신을 70만개 정도 구매했다. 앞으로 추가로 4000만개를 더 구매할 예정이다. 이 백신은 H5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효과가 있다. 핀란드는 6월 모피용 동물과 가금류 농장에서 일하는 고위험 근로자를 중심으로 H5N1에 대한 백신 접종을 시작했다.

라스무센 박사는 “다른 국가, 특히 미국에서도 고위험 근로자에게 백신을 맞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5월 CSL 시퀴러스의 독감 백신을 약 500만개 구매했다.

하지만 이 백신은 달걀에서 배양한 불활성화 바이러스주로 만들어 가격은 저렴하지만 생산 속도가 더디다. 연구자들은 메신저리보핵산(mRNA) 기술을 이용해 새로운 백신을 만들고 있다. mRNA 백신은 바이러스의 유전체만 알면 빠르게 개발할 수 있다. 그래서 변종 바이러스가 나타나더라도 기존 백신 플랫폼보다 새 백신을 빠르게 만들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비해 발빠르게 개발, 상용화됐던 화이자, 모더나 백신이 바로 mRNA 백신이다.

헨슬리 교수는 H5형 인플루엔자바이러스에 대한 mRNA 백신을 만들어 족제비에게 효과를 테스트하기도 했다. 그는 “인플루엔자 mRNA 백신은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라며 “만약 H5N1 대유행이 발생하더라도 이 백신을 널리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보건복지부(HHS)는 지난 주 미국 모더나에 H5형 인플루엔자에 대한 mRNA 기반 백신을 개발하도록 1억7600만달러(약 2423억 5000만원)를 지원했다.

mRNA 백신은 바이러스의 유전체만 알면 빠르게 개발할 수 있다. 그래서 변종 바이러스가 나타나더라도 기존 백신 플랫폼보다 새 백신을 빠르게 만들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비해 발빠르게 개발, 상용화됐던 화이자, 모더나 백신(사진)이 바로 mRNA 백신이다./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대유행 때와 마찬가지로 저소득, 중간소득 국가들은 H5N1 대유행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니콜 루리(Nicole Lurie) 전염병대비혁신연합(CEPI) 고문은 “기본 백신의 절반이 이미 계약에 묶여 있다”며 “저소득, 중간소득 국가들은 코로나19 때와 마찬가지로 가장 늦게까지 백신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H5N1 전파 위험을 낮추기 위해 소에게 백신을 접종하는 방법도 모색하고 있다. 제나 구스밀러(Jenna Guthmiller) 미국 콜로라도대 의대 교수는 “소에게 백신을 맞혀 H5N1 전파를 줄이는 것이 훨씬 실용적”이라고 주장했다. 여러 연구진이 소에게 접종할 H5N1 백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이 바이러스는 소젖의 상피세포에 모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 부분은 면역반응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소에게 백신을 맞히는 것에 대해 비관적인 연구자도 있다. 토마스 피콕(Thomas Peacock) 영국 임페리얼칼리지런던 연구원은 “백신을 맞은 소는 여전히 전염성이 있음에도 무증상으로 지나갈 수 있다”며 “오히려 사람을 전염시킬 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비슷한 이유로 마틴 비어(Martin Beer) 독일 연방동물건강연구소 교수는 “다른 모든 격리 단계를 해보고나서도 전파를 막기 어려울 때 마지막 방법으로 소 백신을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구자들은 또한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널리 퍼지기 전에 먼저 바이러스를 감시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 이사벨라 몬느(Isabella Monne) 이탈리아 베니스실험동물예방연구소 연구실장 연구진은 유럽 전역에서 수집한 소 혈액과 젖으로부터 바이러스 입자와 항체를 검출하는 도구를 개발해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과거 감염됐던 바이러스 흔적을 제대로 찾을 수 있는지 유럽과 미국, 캐나다에서 소 혈액, 젖을 대상으로 테스트하고 있다.

피콕 연구원팀은 H5N1 바이러스가 세포에 침투하는 데 사용하는 헤마글루티닌 단백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돌연변이를 예측했다. 각 돌연변이 단백질이 사람의 코와 입에 들어왔을 때 기도에 얼마나 잘 들러붙어 감염 위험이 높은지 세포실험을 했다. 피콕 연구원은 “이들 돌연변이는 조류에서 소, 소에서 사람으로 H5N1이 퍼지는 것에 관여한다”며 “실제로 H5N1의 돌연변이를 스캔하면 실시간 위험 예측이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참고 자료

Nature(2024), DOI: https://doi.org/10.1038/d41586-024-022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