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증원을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넉 달째 이어지고 있다. 전공의들이 떠난 병원들은 적자 폭이 커져 도산 위기까지 내몰렸다. 의료계는 병원에 물품을 납품하는 업체가 도산하고 간호사를 비롯한 보건의료직이 일자리를 잃는 게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다.
의료 공백이 병원 경제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의대 교수들이 전공의 몫까지 떠안는 바람에 연구할 시간마저 잃어버렸다. 국제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대한의학회지(JKMS)’도 의정 갈등 여파로 논문 투고가 크게 줄어들었다. 한국 의학계의 미래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 16일 경기도 부천시 가톨릭대 부천성모병원에서 만난 유진홍 JKMS 편집장(감염내과 교수)은 “최근 논문 투고량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며 “의료 대란이 길어지는 만큼 한국 의학계의 연구활동이 엄청나게 위축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마도 JKMS뿐 아니라 국내 모든 의학 학술지들이 겪어야 할 시련”이라고 우려했다. 다음은 유 편집장과의 일문일답.
–JKMS는 어떤 학술지인가.
“JKMS는 대한의학회가 동료심사를 거쳐 매주 영문으로 발행하는 국제 의학 저널이다. 국내 의학자들이 가장 많이 논문을 내고 또 인용을 많이 하는 곳이다. 1986년에 창간했다. 초기에는 국내 학술지로 분류됐지만 2005년 기점으로 당당히 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SCIE)급 저널이 됐다. 논문을 투고해 게재 결정이 나기까지 평균 1.7주가 걸리고, 여러 번 교정을 거쳐 실제 게재까지는 평균 23.1주가 걸린다. 투고하는 논문 중 게재가 되는 비율은 2023년 기준 20.1% 정도 된다.
특히 2019년 이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대유행하면서 JKMS에 투고하는 논문 양이 급증했다. 동료심사를 거쳐 매주 수십편이 올라올 정도로 발전했다. JKMS에 논문을 싣는 것은 해외 저명 학술지에 싣는 것과 위상이 비슷하다. 또한 영문으로 발행되기 때문에 국내뿐 아니라 해외 의학자들도 JKMS에 실린 논문을 많이 인용한다.덕분에 3~4에 머물던 JKMS의 피인용지수(IF, 임팩트 팩터)가 5.0을 넘었다. 현재도 4.5 정도 유지하고 있다.”
–아시아대표로 국제의학학술지 편집위원회(ICMJE) 회원이 됐다. 어떤 의미가 있나.
“지난 1월 JKMS 편집장이 되고 나서 홍성태 전 편집장(서울대 의대 교수)에 이어 ICMJE 회원이 됐다. ICMJE는 ‘랜싯’, ‘미국의학협회지(JAMA)’,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NEJM)’, ‘브리티시 메디컬 저널(BMJ)’등 세계 의학계에서 내로라하는 저명한 저널의 편집장들이 모인 곳이다. 유명 저널의 편집장 외에도 각 대륙마다 회원이 하나씩 있다. 가령 아프리카는 에티오피아, 중동은 이란, 남미는 칠레, 오세아니아는 뉴질랜드의 대표 의학 저널 편집장이 회원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중국을 제치고 한국 저널인 JKMS가 꼽혔다. 연속으로 ICMJE 회원이 된 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평가를 받은 게 아니다. JKMS가 그만큼 세계 의학계에서 당당히 어깨를 견줄 만큼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다. JKMS가 한국을, 그리고 아시아를 대표해서 세계 학계에 나서는 자리다. 굉장히 영광스럽다.
ICMJE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의학 논문의 ‘기준’과 ‘윤리’를 정한다. 여기서 정한 기준과 윤리를 전 세계 5500여 의학 저널이 따른다. 최근에는 연구윤리 분야에서 인공지능(AI) 이슈가 많기 때문에 올해 11월 모임에서는 이와 관련된 회의를 할 것 같다. 이번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를 토대로 2025년 개정안이 나올 계획이다.”
–의정 갈등이 이어지면서 JKMS도 영향을 받았다고 들었다.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난 의료 공백으로 전문의, 의대 교수들이 병원을 지키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만큼 연구 활동을 하고 논문을 쓸 시간이 확 줄었다. JKMS에 투고하는 논문의 양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 연구자들이 실험이나 논문 작성을 지속할 여력이 없어서로 보인다. 심지어는 논문 게재 전 수정 과정에서 시간이 없어 멈춘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저널을 운영하기가 재정적으로도 많이 힘들어졌다. 투고량 뿐만이 아니다. 논문이 들어오면 동료 전문가들이 규정상 2개월 안에 심사를 해야 한다. 그런데 병원 일이 바빠 동료심사 기한을 미뤄 달라는 요청이 빗발치고 있다. 결국 의정 갈등이 병원만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의학계의 학문 활동도 엄청나게 위축시키고 있다.
정부는 의정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병원들이 전문의 중심으로 인력구조를 개편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한국 의학계를 위축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대형병원이 전문의 위주로 돌아가면 전공의 수련도 힘들어진다. 또한 전문의들이 주요 인력이 되면 병원이 수입에 대해 가하는 압박도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전문의들이 연구 활동을 전처럼 열심히 하기가 사실상 어려워진다. 연구에 투자하는 시간이 줄어들면 당연히 논문 활동, 학회 활동이 위축될 것이다. JKMS뿐 아니라 국내 모든 의학 저널들이 시련을 겪게 될 것이다. 지금 의료 공백 상황과 비슷하다고 예상할 수 있다.”
–어려운 시기에 JKMS의 편집장이 됐다.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 나갈 생각인가.
“먼저 학술지의 질을 높이겠다. 임팩트 팩터가 좀 더 높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국가기관에서 나오는 중요한 데이터를 논문화하는 데 적극적으로 임하고 싶다. 질병관리청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국립암센터 등에서 중요한 데이터들이 줄곧 나오고 있는데 이 국가적인 통계들을 정리한 논문들을 적극 수용하겠다. 예를 들어 국민영양통계가 기존 보고서대로 나올 수도 있지만, SCI급 저널인 JKMS에 논문으로 실리면 더욱 공신력 있을 것이다. JKMS와 국가 연구기관들이 서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
JKMS는 국내 의학 저널 중에서 유일하게 모든 전공과목을 아우르고 있다. 이 말은 과를 불문하고 모든 의료인이 보는 학술지라는 얘기다. 교육 도구로써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현재 가톨릭대 의대 내과에서 매달 JKMS를 활용해 토론을 하고 퀴즈를 내고 있다. 이것을 시작으로 더 많은 의료인들이 JKMS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
국제 저널과 관계도 맺고 싶다. JKMS는 2022년 홍콩메디컬저널과 제휴를 맺고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앞으로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아시아 지역 저널과도 관계를 이어나갈 생각이다. 개인적으로는 JKMS 편집장이라는 책임감이 있어 사설을 많이 쓰고 있다. JKMS의 질을 높이고 다른 의학자들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의정 갈등이 좀 더 길어질 것 같은 분위기다. 끝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의사들이 돈벌이 때문에 또는 자리 싸움 때문에 정부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 많이 올라온다. 하지만 의사, 특히 의대 교수는 의학을 연구하는 의학자이다. 의사 전체가 매도 당하는 것 같아 속이 상하다. 상당수 많은 의학자들은 정체성을 잊지 않고 끊임 없이 노력하고 자기계발을 하고 있다.
앞으로 정부와 갈등을 해소하고 전공의들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병원이나 의학계 분위기가 예전 같이 않을 것으로 우려된다. JKMS 편집장으로서 한국 의학계가 위축되지 않고 더 많은 의학자들이 활발한 연구활동을 이어나가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