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미국 다르파(DARPA·국방부 산하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의 성공 비결은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와 제도에 있어요. 하지만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 국가에선 쉽지 않아요. 한국형 아르파에이치(ARPA-H·보건의료고등연구계획국)는 그동안 우리가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실패해도 좋으니 덤벼보자’는 거지요.”
17일 서울 중구 사무실에서 만난 선경 한국형 ARPA-H 프로젝트추진단장은 “이 프로젝트가 DARPA처럼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실패를 용인하고 실패에서 학습하는 문화를 만들고 이를 보장하고 뒷받침해줄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선 단장은 흉부외과 전문의이자, 한국형 인공심장 실용화 개발을 주도한 의사 과학자다. 그가 이끄는 한국형 ARPA-H는 올해부터 시작된 보건복지부의 플래그십 대형 프로젝트로, 국가가 직면한 보건 난제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비용이 많이 들고 어렵지만 파급효과가 큰 임무 중심형 연구개발(R&D)을 추진한다. 미국의 DARPA와 ARPA-H 모델을 벤치마킹했다.
미국 다르파는 도전·혁신적 R&D의 대명사다. 옛 소련이 스푸트니크를 발사한 ‘스푸트니크 쇼크’를 계기로 미국이 냉전시대 적국 소련에 뒤쳐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 1958년 설립된 거대 연구조직이다. 코로나19 대유행 1년 만에 개발된 메신저 리보핵산(mRNA)백신, 애플의 음성인식시스템(Siri·시리), 구글의 스트리트뷰, 스텔스 기술,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등이 모두 다르파의 획기적인 지원을 받아 세상에 나온 대표적인 도전과 혁신의 산물이다.
미국 ARPA-H는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국립보건원(NIH)이 해결하기 어려운 보건의료 난제 해결을 위해 보건의료혁신기술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 대유행이 군사력 약화, 경제 손실,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새로운 안보 문제가 되고 있다는 판단이 깔려있다.
한국형 ARPA-H 사업은 기존 국내 R&D 지원 사업과 다른 시스템이라는 게 선경 추진단장의 설명이다. 선 단장은 “기존 R&D지원 정책과 달리 산업화가 아닌 보건 안보 측면에서 크게 5가지 임무를 중심으로 R&D를 지원한다”고 설명했다. 백신·치료제 주권 확보로 보건안보 확립하고 암·희귀·난치질환 가운데 미정복질환 극복, 바이오헬스 산업의 판도를 바꾸는 초격차 기술 확보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 초고령화사회 대응 지속가능 복지·돌봄 서비스 개선, 지역완결형 필수의료 혁신기술 확보도 주요 임무다.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PM(프로젝트 관리자)으로 선발하고, 연구 주제 선정부터 추진·평가·관리를 맡게 한다. 선 단장은 이와 관련해 “전문성과 리더십을 겸비한 PM에 많은 권한을 부여하기 때문에 현재 사명감 있고 역량 있는 우수한 PM을 모시는 부분에 가장 역점을 두고 있다”며 “5월에는 PM이 채용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선 단장으로서도 큰 도전이다. 선 단장은 “늘 해오던 방식이 아닌 미국의 혁신적 DNA로 한국 실정에 맞게 한국형 보건의료 R&D의 티핑포인트를 찾아야 하는데, 여전히 경직된 예산 구조와 공공기관 문화 속에서 해당 프로젝트를 운영한다는 점이 굉장히 큰 도전적 임무”라고 밝혔다.
선 단장은 “안정적이고 논문·특허 성과 중심의 R&D 패러다임을 깰 필요가 있다”면서 “우리가 난제들에 도전하면서 불가능에서 가능, 그리고 현실로 점점 나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실패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 실패를 바탕으로 또 다른 도전을 하는 연구자가 있다면, 보건 안보와 산업, 국민의 미래 건강 잠재력이 점점 강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한국형 ARPA-H 브랜드명은 ‘케이헬스미래프로젝트’로 바뀔 예정이다. 보건산업진흥원은 지난달 브랜드 네이밍과 이미지(BI) 개발을 위한 대국민 공모전을 열었다. 다음은 선경 추진단장과의 일문일답.
-의대 정원 확대를 두고 의정 갈등이 불거졌다. 한국형 ARPA-H 주요 임무 중에 ‘필수의료’가 포함돼 있다.
“지금 의대 증원 문제를 두고 벌이는 갈등도 결국 필수의료 문제에서 비롯됐다. 복잡한 필수의료의 문제를 단순히 하나의 제도만으로 해결하기는 쉽지 않다고 본다. 의사들의 선의만을 기대할 수도 없는 시대다. 직능 이해당사자들 간에 첨예한 대립 문제로만 접근하면 해결이 쉽지 않을 거라고 본다. 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바로 ‘과학기술’이 함께 필수의료 영역의 문제들을 풀어가고 돌파해야 한다. 이런 취지에서 한국형 ARPA-H 미션 중 하나로 ‘필수의료’가 담긴 것이다. 필수의료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과학기술을 찾아 연구 개발에 성공한다면 환자도 ‘윈(win)’, 의사와 정책입안자도 모두가 ‘윈(win)’할 수 있다.”
-주요 5가지 임무는 어떻게 추진되나.
“프로젝트당 5년이라는 기간이 설정돼 있다. PM을 중심으로 개방형 기획과 전략적 투자가 이뤄진다. 5월에 PM이 채용되고 이어 상세 기획과 과제 공고를 할 예정이다. PM들이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는 상당히 광범위한 포트폴리오를 가져야 할 것으로 본다.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경제·사회적 부분, 규제, 윤리적인 부분을 모두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난제 해결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부터가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우리 추진단에서는 미국 DARPA, ARPA-H처럼 ‘하일마이어 질문(Heilmeier Catechism)’을 활용할 계획이다.”
- ‘하일마이어 질문’은 뭔가.
“미국 다르파의 전직 이사인 조지 하일마이어(George H.Heilmeier) 박사가 고안한 ‘리스크가 높은 연구제안서를 평가할 때, 가장 핵심적인 평가요소’로 두는 질문이다. PM들은 질문을 답하는 과정에서 프로젝트의 아이디어가 높은 잠재력을 가지는지, 새로움이 있는지, 타당함을 제시하는지 입증할 수 있다. 자원과 인프라를 이용해 무엇이 효과가 없는지를 빨리 파악해 효과가 있는 방향으로 통찰력 있게 프로젝트를 끌고 가야 한다. 하일마이어질문도 이를 위한 도구 중 하나다.”
-한국 제약바이오, 헬스케어 산업의 R&D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여전히 기존 국내 R&D 시스템은 협력보다는 분절적이고 배타적인 경쟁 구도를 만든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새로운 기회 창출의 수월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 글로벌 진출을 하기에도 경쟁력이 부족하다. 한국형 ARPA-H 사업에서는 제약바이오·헬스케어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규모의 경제를 키우기 위해 주요국과 개방성, 상호의존성을 전제로 글로벌 오픈이노베이션 R&D 전략을 추진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감염병의 경우 백신개발 환경에서 발생하는 데이터 공유, 국제 공동 연구개발 기획 등이다. 미국 기관을 벤치마킹한 만큼, 우리 추진단은 미국 ARPA-H를 포함해 해외 임무중심형 R&D 기관들과 협력해서 한국의 강점을 살려 바이오·헬스케어 분야에서 글로벌 오픈이노베이션을 선도하는 문화와 생태계를 구축하고자 노력할 계획이다.”
-한국에 실패를 용인하는 조직 문화를 만드는 것, 보건 분야의 난제를 해결할 기술을 개발하는 것 모두 그야말로 ‘담대한 도전’같다. 미국처럼 성공적으로 운영되기 위해 필요한 제도·환경적 장치는 무엇인가.
“사업 취지대로 운영되려면 한국 공공기관 특유의 규제 환경 요소를 타파하고 적합한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 미국도 기존 체계를 유지하되, 혁신적인 거버넌스를 만들기 위해 별도 기관을 설립하고 별도 예산을 마련했다. 이런 측면에서 전략을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별도 법인 설립도 필요하다.
현재 ‘공공기관 채용가이드라인’에 따라 블라인드 채용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채용 공정성 측면에서 필요하지만, PM 역할을 확실히 할 수 있는 전문성과 리더십을 겸비한 전문가를 확보하고 영입하는 데 어려움도 따른다. 혁신도전형 R&D 사업의 별도 심의관리 절차 제도도 마련될 필요가 있다. 가령, 국가재정법상 회계연도 일치를 위한 단년도 예산 편성, 국가과학기술심의회의와 기재부의 지난한 R&D 예산 배분·조정 프로세스, 논문·특허 중심의 정량적 R&D 성과지표, 일관된 국가 R&D 성과평가 시스템과 도전적 연구, 실패 용인 문화 부재 등 앞으로 풀어가야 할 숙제들이 상당하다.
사업 이해도를 확산하고 사업 목적과 국민의 기대치 간 간극을 좁히는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실패를 용인하고, 실패에서 학습하는 문화를 만드는 게 매우 중요하다. 실패를 성공의 과정이라고 여겨야 성공에 이른다. 미국 다르파가 정의하는 ‘혁신’은 절반은 ‘그게 되겠어?’라고 말하는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도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보건 안보와 R&D 강국이 될 수 있는 저력이 있다. 실패에 인색하지 않은 문화와 제도가 마련돼야 우리도 혁신적인 과학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
-선경 추진단장은.
1981년 고려대 의학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의학 석사 학위와 흉부외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부터 2022년까지 24년간 고려대 의대 흉부외과 교수로 활동했다. 흉부심장혈관외과학회 이사장, 생체재료학회 회장을 지내면서 학제 간 융합연구 활성화와 한국형 인공심장 실용화 개발을 주도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R&D 진흥본부장, 오송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