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의대 입학 정원을 2000명 늘리기로 한 것과 관련해 의사들이 반발하는 가운데 양측이 연일 강도 높은 비판과 경고를 쏟아내고 있다.
전공의 단체인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의대 정원 확대’에 반대하며 머리를 맞댔지만, 당장은 집단행동에 돌입을 결정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연일 쏟아내는 경고에 맞서 파급력이 큰 집단행동을 보여주기 위한 준비라는 평가가 많다. 여기에 의사단체인 대한의사협회가 15일 동시다발 집회를 예고하고 있어 집단행동 확산과 이를 막으려는 양측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복지부 “젊은 의사들 의견 개진해 달라”
복지부는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 정례 브리핑에서 전공의와 의대생의 집단행동을 막기 위한 공개 토론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대한의사협회 일부 인사를 거론하며 젊은 의사들의 투쟁을 부추기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복지부는 최근까지도 중수본 브리핑을 통해 의사단체의 집단행동에 대해 ‘집단 사직서 수리 금지’, ‘업무 개시 명령 위반 시 의사면허 취소 검토’ 등 강경한 입장을 보여왔다. 하지만 이날은 “젊은 의사들의 선택을 믿는다”며 젊은 의사들을 달래는 누그러진 발언이 주를 이뤘다.
박민수 복지부 2차관은 “더 좋은 내용을 제시한다면 정부는 과감히 수용하겠다”며 “언제든지 의견을 개진해 달라”고 말했다. 박 차관은 “가장 혹독한 의료 환경에서는 일하는 분들이 전공의와 전임의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며 “지금도 밤샘 근무, 장시간 수술 등 어려움을 참아가면서 환자 곁을 지키고 있지 않느냐”고 했다.
복지부가 젊은 의사들을 다독이고 나선 것은 이들이 필수의료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 고려된 것으로 풀이된다. 전공의 단체에 가입한 의사는 1만5000명 가량으로 전체 의사의 13%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들은 대학 병원의 수술실과 중환자실, 응급실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이들이 파업에 나서면 응급 중환자 진료가 당장에 큰 차질을 빚게 된다.
4월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여당의 주요 지지층인 의사들, 특히 여당의 주요 공략층인 20~30대 의사들에 대해 연일 강도 높은 경고가 이어지면서 지지율 하락을 우려한 나머지 달래기에 나섰다는 평가도 나온다.
결국 정부는 전공의 파업을 최대한 막아야 하고, 반대로 의사단체는 전공의 집단행동을 이끌어내야 정책 반대의 동력을 얻게 된다. 지난 2020년 정부가 의대 정원 증원 정책 추진 당시에도 전공의 단체가 파업에 참여하면서 상황이 복잡했다. 당시 전공의들의 파업 참가율은 70~80% 가량으로 높았다.
하지만 여론의 분위기는 정부쪽으로 기울어 있다. 보건의료노조가 지난해 실시한 조사에선 응답자 89%가 ‘의대 정원 확대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다른 조사에서도 응답자 70~80%가 의대 증원에 찬성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역대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지난 2020년 의사 단체들이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에 반발해 파업할 때는 ‘의대 증원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50%대에 머물렀다.
◇ 군복무에 전공의 근무 경력 인정까지 복잡
전공의단체는 지난 12일 정부의 ‘의대 2000명 증원’ 저지를 위한 대응책을 논의했으나 파업 여부는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 협의회는 현재 회장을 제외하고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한 상태다. 이는 당장 파업에 나서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박단 협의회 회장은 전날(13일) 밤 8시쯤 페이스북에 “전공의는 국가의 노예가 아니다”며 “지금이라도 2000명 의대 증원 계획을 전면 백지화 하라”고 요구했다.하지만 이 글에도 파업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전공의 단체는 오는 18일쯤 다시 파업 문제를 논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선뜻 집단행동에 뜻을 모으지 못하는 것은 개인적 피해가 막심하기 때문이다. 전공의들은 수련병원과 계약할 때 3~4년 단위로 다년제 계약을 하는데 이 계약을 2~3월에 갱신한다. 지금 파업을 했다가 정부가 의료법 위반으로 고발하면 지난 1년간 전공의 근무 경력이 인정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수련 규칙을 보면 1개월 전에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해야 하는데, 계약 갱신 의사 표시 기간은 이미 지난 상태다. 결국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병원이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있다.
인턴을 마친 후 레지던트를 지원하지 않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지만, 남성의 경우에는 군복무가 발목을 잡는다. 올해 의무사관후보생은 선발 절차가 끝났기 때문에 군의관으로 복무하려면 내년으로 기다려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현역으로 곧바로 입대를 해야 한다.
1년을 허송세월을 보내고,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귀한다고 해도, 전공의 지원이 쉽지 않다. 중도에 (탈락한) 인턴은 빈자리가 나와야만 전공의 지원이 가능하고, 전공의 1년 수련을 마쳤다 하더라도 다시 수련해야 한다.
집단으로 사표를 낸다고 대학병원이 실제 사표를 수리하기도 어렵다.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아직 주요 대학병원에 전공의 사표가 수리된 것은 없다”며 “정부가 집단 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병원이 이를 어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지난 2020년 의대생 파업 때 국가고시를 거부한 전공의들이 현재 전공의 2년차에 있다. 이들이 겪은 트라우마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 의협 “전공의 재계약 거부 법리적 문제 없어”
개원의 단체인 대한의사협회는 전공의들의 집단 행동을 적극 지지한다고 밝히면서 오는 15일 전국 각지에서 ‘의대 증원 반대 궐기대회’를 열겠다고 예고했다. 이 밖의 구체적인 투쟁 방식·시기를 17일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15일 궐기대회를 열고, 16일까지 비대위 위원을 꾸린 후 17일 제1차 비대위 회의를 열겠다는 것이다.
김택우 의협 비대위 위원장은 이날 오후 서울 용산 의협 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전공의 등 젊은의사들의 요청으로 집단행동에 대한 법률자문도 이미 모두 받은 상태라고 했다. 전공의들의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개별적으로 하는 것이면 법리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는 자문을 받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고 봤다.
주수호 의협 비대위 언론홍보위원회장은 “수면 위에 보이진 않더라도 이미 전공의 단체 행동이 시작됐다”며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선 전공의 집단 사퇴가 완료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이날 박단 회장의 페이스북에는 52개의 댓글이 달렸다. 한 개원의는 “개원의들도 수 억원 날릴 각오하고 문 닫고 쉴 준비 중이다”라며 “대전협 지도부는 재계약후 사직서라는 소꿉놀이 장난질로 3월 말까지 골든타임 허송세월 보내는 건가”라고 말했다.
의료계 일각에선 “파업을 총선 직전에 실시해 정부·여당을 흔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은 전날(13일) 페이스북에 “이번 싸움의 정확한 상대는 복지부가 아니라 청와대(대통령실)”라며 “(전공의 등) 의사들의 투쟁 시작 시점은 2월 하순으로 잡길 권고한다. 4월 총선을 앞둔 3월이 정치인들에게 가장 취약한 시기이기 때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