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항생제인 카바페넴에 내성을 가진 세균이 급증하고 있어 세계적인 보건 문제로 떠올랐다. 보건 전문가들은 가장 흔히 쓰는 카바페넴을 대체할 새 항생제가 나오지 않으면 2050년까지 해마다 전세계에서 100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과학자들이 최근 세계보건기구(WHO)가 인류를 위협할 것으로 꼽은 항생제 내성균을 잡는 새 후보물질을 개발했다. 미국 하버드대와 글로벌 제약사 로슈 연구진은 3일(현지 시각) 주요 항생제 성분인 카바페넴에 내성을 보이는 세균인 ‘아시네토박터 바우만니(Acinetobacter baumannii)’에 효과가 있는 ‘조수라발핀’이란 후보 물질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동물실험까지 성공한 이 물질은 세균이 항생제를 막아내기 위해 뒤집어쓰는 지질다당류 껍질의 생성을 방해하는 원리다.
◇그람음성균이 항생제 이기는 비결은 지질다당류로 만든 ‘두꺼운 이불’
보건 전문가들은 항생제 처방이 늘면서 점점 더 강한 항생제를 투약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는 내성을 갖는 세균이 등장하면서 심각한 위기로 보고 있다. 이 세균은 ‘인류 최후의 항생제’라 불리는 카바페넴에 대한 내성을 갖고 있어 인체에 감염됐을 때 치료가 어렵다.
WHO는 2017년 녹농균(Pseudomonas aeruginosa)과 엔테로박테리아세(Enterobacteriaceae)를 포함해 항생제 주요 성분인 카바페넴에 내성을 가진 내성균 3종을 인류 건강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세균으로 지목했다. 이들 세균은 항생제에 대한 특별한 내성을 가지는 그람음성균으로 분류된다.
보통 세포 하나로 이뤄진 미생물인 세균은 내부의 압력을 견디기 위해 단단한 세포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런 세균 중 그람음성균은 세포벽 일부가 지질다당류(LPS)로 둘러싸여 있다. 강한 산성이나 고온의 극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면역 물질이나 항생물질이 세균으로 들어가는 것을 물리적으로 막는다.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지는 날 자동차 안에 있으면 젖지 않고 안전한 것과 비슷한 이치다.
카바페넴은 그람음성균에 대항하는 유일한 항생제다. 카바페넴이 나온 뒤 50년 간 그람음성균에 대한 새로운 항생제가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카바페넴 내성균에 대한 치료제는 없다.
◇세균이 ‘두꺼운 이불’을 만들지 못하게 공격
연구진은 그람음성균이 세포벽을 만들 때 Lpt를 통해 세포 포면까지 LPS를 분비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 수용체를 방해하면 세균이 세포벽을 제대로 만들지 못해 항생제가 세균 안까지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이번에 개발한 항생제 후보 물질인 조수라발핀은 LPS에 단백질 수용체(Lpt)가 들러붙어 결과적으로 세균 바깥으로 분비되는 것을 구조적, 화학적, 유전적으로 방해하는 원리다. Lpt 수용체와 이 수용체가 분비하는 LPS 7종을 모두 인식해 이들이 결합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결국 Lpt 수용체에 들러붙지 못한 LPS는 세균 표면으로 나가지 못하고 세균은 보호막을 치지 못한다.
연구진은 내성균인 아시네토박터 바우만니에 감염된 쥐에게 조수라발핀을 적용한 결과 실제로 폐렴, 패혈증 증상이 줄어들고 세균 수도 줄어들어 결국 죽지 않는다는 결과를 얻었다.
마이클 로브리츠 로슈 연구 글로벌책임자는 “이번 실험을 통해 이 약물이 LPS가 세균의 바깥으로 이동해 껍질을 만드는 것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비슷한 원리로 LPS 이동을 방해하는 작용을 하는 약물을 만들면 카바페넴에 내성을 가진 다른 내성균을 치료할 방법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엔드루 에드워즈 영국 임페리얼칼리지런던 박사후연구원은 3일(현지 시각)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내성균인 아시네토박터 바우만니는 중환자실 인공호흡기를 사용하는 환자에게 감염되면 치명적”이라며 “이번 연구를 통해 이 세균 감염을 치료할 수 있는 새 항생제가 나오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연구진은 추가 연구를 거쳐 임상시험에 돌입해 향후 인체 감염을 치료하는 약물로 개발할 예정이다. 이번 연구 결과는 이달 3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됐다.
◇내성균 잡을 무기로 ‘바이러스’도 제기
이날 영국 과학혁신기술위원회는 앞으로 등장할 내성균에 대응하기 위해 박테리오파지 치료법을 개발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박테리오파지는 세균을 감염시켜 증식하는 바이러스다. 이론상 인간에게 해가 없고 특정한 세균만 죽일 수 있어 학계에서는 이를 이용한 치료법(파지 치료법)을 개발해야 한다는 지적이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1915년 파지가 발견된 뒤 프랑스 세균학자 펠릭스 데렐은 파지를 이용해 세균 감염을 치료하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1930년대 설파계 항생제와 페니실린이 발견되면서 파지 치료법 산업은 침체됐다. 이후에는 2016년 모든 항생제에 내성(다중항생제내성)인 토마스 패터슨 박사가 세균 감염으로 생사를 오가는 심각한 상황에 빠졌는데, 아내인 스테파니 스트라스디 박사가 파지 치료법을 사용한 것이 유일하다.
2020년대 들어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세균이 늘어나면서 여러 연구팀이 파지 치료법을 인체에 무해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파지가 특정한 세균만 공격하기 때문에 내성균마다 고유한 천적인 파지를 찾는 것이 가장 큰 숙제라고 보고 있다.
참고 자료
Nature(2024),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3-06799-7
WHO(2017), https://www.who.int/publications/i/item/9789241550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