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퍼 유전자 가위(CRISPR-Cas9)를 기반으로 한 치료제가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았다. 유전자 가위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인 김진수 전 서울대 교수는 “신약 개발 역사에 기념비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미 FDA는 지난 8일(현지 시각) 미국의 버텍스 파머슈티컬스와 스위스 크리스퍼 세러퓨틱스가 공동 개발한 겸상 적혈구 빈혈증 치료제 엑사셀의 허가 심사를 승인했다고 밝혔다. 유전자 가위 기술을 이용한 치료제가 FDA 승인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겸상 적혈구 빈혈증은 11번 염색체의 염기에 이상이 생기면서 적혈구가 낫 모양으로 변하는 질환이다. 낫 모양으로 변한 적혈구는 혈관을 막거나 산소 전달 능력을 떨어뜨린다. 나중에는 혈관 폐쇄성 위기 같은 심각한 합병증을 동반한다. 전 세계적으로 500만명 정도의 환자가 있고, 미국에서만 10만명의 환자가 있다. 지금까지는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하는 약물만 있었고 근본적인 치료제는 없었다.
이번에 FDA 승인을 받은 엑사셀은 겸상 적혈구 빈혈증의 근본적인 치료가 가능한 치료제다. 환자의 혈액 줄기세포를 채취한 뒤 몸 밖에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헤모글로빈 생성을 막는 ‘BCL11A’ 유전자를 없앤 뒤 다시 환자의 몸 안에 주입하는 방식으로 치료가 이뤄진다.
니콜 베둔(Nicole Verdun) FDA 생물의약품평가연구센터 사무국장은 “겸상 적혈구 빈혈증은 희소한 동시에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으로 오늘 새로운 치료제를 승인할 수 있게 돼 기쁘다”며 “유전자 치료는 치료법이 마땅치 않은 희소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더욱 효과적인 치료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새로운 치료법이 나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FDA와 버텍스 등에 따르면, 엑사셀을 이용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자는 많지 않다. FDA는 미국 내에서 2만명 정도의 환자가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예상하고 있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다.
우선 치료에 필요한 비용이 적지 않다. 버텍스는 엑사셀을 이용한 유전자 편집에만 220만달러(약 29억원)의 비용이 든다고 밝히고 있다. 돈이 있다고 다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버텍스는 현재 단 9곳의 센터에만 엑사셀 치료법을 제공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50곳까지 늘릴 계획이지만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전망이다. 치료센터 1곳이 1년에 치료할 수 있는 환자의 숫자도 5~10명 정도가 한계다. 50곳까지 치료센터가 늘어도 1년에 치료할 수 있는 환자의 수는 500명 정도에 불과한 셈이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서 엑사셀 치료를 받게 되더라도 하루아침에 병을 고칠 수 있는 건 아니다. 엑사셀을 이용한 치료는 환자의 골수 줄기세포를 채취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충분한 줄기세포를 채취하는 데에만 몇 달이 걸린다.
이렇게 채취한 줄기세포를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편집하는 데에도 4달 정도가 걸린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편집한 줄기세포를 환자에게 주입하는 것도 쉽지 않다. 새로운 줄기세포가 환자의 골수를 채우기 위해서는 화학요법을 통해 환자의 골수를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이 기간 환자의 면역체계가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에 한 달 이상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엑사셀은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겸상 적혈구 빈혈증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될 것으로 보인다. 뉴저지의 로완대학교에 재학 중인 19세의 하자 샌디라는 겸상 적혈구 빈혈증 환자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신이 허락한다면 치료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모르핀을 맞아야 할 정도의 극심한 통증으로 수시로 병원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