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서울아산병원은 전신에 비정상적인 종양이 생기는 희귀질환인 신경섬유종증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시작했다. 영국의 아스트라제네카(AZ)가 개발한 알약(경구용) 치료제 '코셀루고'의 효능을 국내 환자들도 경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환자 90명 대부분 혹이 확연히 줄면서 증상이 호전됐고, 2021년 5월 마침내 국내에서도 사용이 승인됐다.
이범희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센터 교수는 이 모든 과정을 직접 진행했다. 가장 먼저 아스트라제네카에 연락해 국내 임상을 위한 치료제 무상 지원을 요청했다. 치료제 지원을 허가받은 후엔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제출할 연구자 주도 임상시험계획(IND)도 직접 작성했다. 1년 이상 걸렸다.
희귀질환은 전체 환자 수가 2만명 이하이거나 진단이 어려워 유병 인구를 알 수 없는 질환이다. 전 세계 희귀질환 환자 수는 약 3억명에 달하고, 국내도 매년 5만여명의 신규 발생자가 추가돼 현재 100만명으로 추산된다. 희귀질환은 현재 7000여개로 추정되며, 국내에는 지난해 기준 총 1165개 희귀질환이 등록돼 있다. 현재까지 국내 승인된 치료제는 32개뿐이다.
해외에서 새로운 희귀질환 치료제가 개발돼도 국내에 도입되려면 길게는 10년 이상 걸리기도 한다. 이 교수는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 직접 연락해 치료 기회를 조금이라도 앞당기는 쪽을 택했다. 이렇게 해외 제약사에 접촉하면 국내 들어오기까지 1~3년으로 대폭 줄일 수 있어서다.
이 교수는 "희귀질환 치료제를 개발한 해외 제약사들에게 임상 치료제 지원해달라고 밤낮으로 애원하면 치료 기회를 10년을 앞당길 수 있다"며 "그나마 아스트라제네카는 한국 지사가 있어서 비교적 수월했지만, 한국에 지사가 없는 곳은 전화나 화상으로 밤낮 없이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의대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이 교수는 미국 마운트 시나이 아이칸 의대에서 의학유전학분야 박사 후 연수 과정을 밟았다. 이후 서울아산병원에서 소아청소년과 교수로 의학유전학센터에서 선천성 대사 질환, 유전 질환 클리닉, 신경섬유종클리닉, 염색체 이상, 유전대사 및 유전 질환 등 유전성 희귀질환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다.
매년 5월 23일은 '희귀질환 극복의 날'이다. 희귀질환에 대한 국민 인식 개선과 예방·치료, 관리 의욕을 높이기 위해 법정기념일로 지정돼 있다. 이 교수는 지난 23일 질병관리청이 주최한 '제7회 희귀질환 극복의 날'에도 참석해 치료제 도입으로 치료 효과를 본 국내 희귀질환 환자 사례를 소개했다. 이 교수는 치료제 도입뿐 아니라 국내 희귀질환 환자들을 위한 제도적 개선을 위해서도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 23일 이 교수를 서울아산병원에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어떤 희귀질환을 진료하고 있나.
"전공은 소아청소년과이지만 의학유전학센터에서는 소아와 성인 진료를 다 보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희귀질환 7000여개 중 80%가 유전적으로 발생한다. 유전성 희귀질환 중 가장 많이 보는 질환은 다운증후군, 터널증후군 같은 염색체 질환이다. 한 개의 유전자가 잘못돼 발생하는 단일 유전자 질환 경우에도 윌슨병, 누난 증후군, 신경섬유종증 등 다양하게 보고 있다."
-7000여종에 달하는 다양한 희귀질환을 모두 진료하는 게 가능한가.
"다 아는 건 불가능하다. 희귀질환 종류가 너무 많고 새롭게 발견되기도 해서 생소한 질환이 많다. 인터넷을 찾아봐도 없고, 외국 사이트를 뒤져봐야 조금 나오는 수준이다. 오히려 환자나 환자 부모님들이 다 검색해서 알려주실 때도 있다. 환자 분들은 자신의 병이 어떤 건지도 모르니 답답하실 거다. 미국이나 선진국들 보면 각 희귀질환별로 전문가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질환별 전문성은커녕 희귀질환만 전문적으로 보는 의사도 많지 않다. 유전학 클리닉을 하는 병원은 서울에 10곳도 안 된다. 그래서 전문가 양성이 시급하다."
-희귀질환 전문가가 적으니 그만큼 환자들도 많이 몰릴 것 같다.
"그게 환자 분들께 가장 죄송한 부분이다. 외래 진료 대기는 3개월 넘게 걸린다더라. 그래도 최대한 많은 분을 만나려고 하루 6~70명, 일주일에 300명 정도 보고 있다. 실제 외래에서 보는 환자 수의 2배 수준이다. 유전질환을 이 정도로 보는 건 말이 안 된다. 희귀질환은 충분한 설명이 필수인데, 너무 많은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한 사람을 짧게 볼 수밖에 없다. 상담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는 게 가장 마음이 아프다."
-결국 전문가가 많아져야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희귀질환 전문 의사들이 많아지는 건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게 유전 상담서비스 제도화의 필요성이다. 환자가 진단을 받을 때 환자 본인과 가족들은 대부분 암 선고보다 더 큰 충격을 받는다. 암은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지만, 희귀질환은 평생 갖고 살아가야 하는 끝나지 않는 싸움이니 말이다. 환자에게 필요한 건 질환에 대한 의료적인 상담, 심리적 상담, 국가 제도 중엔 어떤 게 있는지, 의지할 수 있는 환자 모임은 어떤 게 있는지, 앞으로 치료는 어떻게 받는지 상세하게 알려줄 포괄 서비스가 필요하다. 유전 상담이 제도권 내 정식 의료 서비스로 도입돼야 한다. 환자에게 꼭 필요하지만 우리가 하지 못하는 상담 영역을 보다 전문적으로 하자는 거다 "
-희귀질환 환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뭔가.
"당연히 치료제다. 해외에서 새로운 치료제가 미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아 시판되면, 우리나라에 공급되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짧으면 5년, 길면 10년 걸리는 경우도 있다. 이젠 정보 접근성이 높아서 FDA 허가 나면 국내 환자들도 금방 안다. 이 시간을 앞당기고 싶어서 다국적 제약사에 직접 접촉해 임상연구를 하고 있다. 환자에게 치료 기회를 조금이라도 빨리 드리기 위해서다. 해외 현지 시간에 맞춰 전화하고, 화상으로 통화하며 애원하기도 했다. 아스트라제네카처럼 국내에 수입공급책이 있으면 그나마 수월하지만, 없는 경우엔 그 회사에서 직접 자료를 받아 약, 개발사, 공장에 대한 정보를 담아 IND를 작성해야 한다. 제약사는 전문 인력이 있지만, 우리는 직접 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임상연구는 어떤 게 있나.
"신경섬유종증은 크게 1형과 2형으로 나뉘는데, 1형이 환자의 비중이 85%를 차지한다. 아스트라제네카가 개발한 '코셀루고'는 신경섬유종증 1형 환자를 위한 치료제다. 우리는 2형 치료제를 해보려고 한다. 2형의 경우 주로 뇌와 척수에 종양이 생겨 환자들에게 치명적이지만, 현재 전 세계적으로 치료제가 없다. 국내 바이오벤처인 PRG에스앤텍이 IND를 제출해 식약처 심사를 받고 있다. 기대가 큰 임상연구다."
-앞으로 뭘 하고 싶나.
"요즘엔 내가 치료를 하는 의사가 아니라 환자들에게 치료제를 연결해주는 중재자 역할이 더 커졌다는 생각이 든다. 초기 연구 단계부터 진행해서 신약을 개발해 환자에게 직접 도움을 주는 게 꿈이다. 임상연구 하면서 환자들의 표정이 바뀌고, 삶을 바라보는 태도 자체가 바뀐다. 코셀루고로 치료 중인 어린 신경섬유종증 환자가 선생님이 꿈이라고 하더라. 이런 꿈을 갖는 걸 치료 기회를 통해 만들어주고 싶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유전질환은 개척할 게 무궁무진하다. 이걸 주도해서 나가는 건 소아과 의사다.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들 와서 유전학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갖춰지면 좋겠다. 힘들다는 인식이 사라져야 하는데, 내가 너무 고생한 이야기만 한 것 같아 걱정이다. 힘들어도 보람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