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열린 유럽알레르기·임상면역학회(EAACI Congress 2026)에서 연구자들이 알레르기·면역학 분야 최신 연구를 공유하고 있다. /EAACI

글로벌 빅파마(대형 제약사)들이 면역질환 신약 확보를 위해 잇따라 지갑을 열고 있다.

미국 제약사 애브비는 109억달러(약 14조 5600억원)를 들여 면역질환 바이오기업을 인수했고, 미국 일라이 릴리도 최대 28억7500만달러(약 3조 8300억원)를 투입해 자가면역질환 치료 기술을 확보했다. 독일 베링거인겔하임은 인공지능(AI)과 환자 데이터를 활용한 신약 발굴에 나섰다.

빅파마들이 면역질환에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미 큰 시장이 형성돼 있다는 점이다. 아토피피부염·건선·류머티즘관절염·천식 등은 환자 수가 많고 치료 기간도 긴 만성질환이어서 한번 효과적인 치료제가 나오면 장기간 안정적인 매출을 기대할 수 있다.

실제 글로벌 제약사들은 면역질환 치료제를 잇따라 블록버스터 제품으로 키웠다. 단적인 예가 자가면역·염증성 질환 치료제 개발과 상업화에 잇따라 성공하며 면역학 분야 강자로 자리 잡은 애브비다. 이 회사는 2025년 면역학 포트폴리오에서만 304억600만달러(약 40조62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는 전년보다 14.0% 증가한 규모다.

그렇다고 시장이 포화된 것은 아니다. 기존 치료제로 증상이 충분히 조절되지 않거나 약효가 떨어지는 환자가 여전히 있다. 치료 과정에서 감염 위험이나 투약 편의성 등의 문제도 남아 있다.

신약 개발 기술도 발전하고 있다. 과거에는 면역반응을 넓게 억제하는 방식이 중심이었다면 최근에는 특정 면역 경로나 질병을 일으키는 자가항체만 골라 차단하거나 제거하는 방식으로 연구가 세분화되고 있다. AI를 이용해 환자별 면역 특성을 분석하고 새로운 치료 표적을 찾는 기술도 등장했다.

빅파마로선 시장에서 기존 치료제의 한계를 넘을 다음 세대의 치료법을 확보하느냐가 기업 성장을 좌우하기 때문에 차세대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해 인수와 투자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있는 애브비(AbbVie)의 한 시설 앞. /연합뉴스

◇애브비, '오래가는 항체' 확보

애브비는 지난 3일(현지 시각) 아포지 테라퓨틱스 인수를 완료했다. 주당 135.11달러, 총 109억달러(약 14조 5600억원) 규모다.

아포지의 핵심 후보물질은 IL-13을 표적으로 하는 반감기 연장 항체 '주밀로키바트(zumilokibart, APG777)'로, 아토피피부염과 천식 등을 대상으로 개발되고 있다.

애브비는 스카이리치와 린버크를 앞세워 면역학 분야에서 성장해 왔다. 이번 인수는 기존 영업망과 연구개발 역량에 연결할 수 있는 차세대 파이프라인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주밀로키바트는 아토피피부염과 천식 등에 관여하는 IL-13을 차단하면서 항체가 체내에 오래 머물도록 설계됐다. 임상 2상에서는 3개월 또는 6개월 간격으로 투여해도 1년간 치료 반응이 유지되는 결과가 나왔다.

애브비는 이를 바탕으로 주밀로키바트가 상용화될 경우 기존 대표 치료제인 듀피젠트보다 주사 횟수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아토피 치료 시장은 이미 듀피젠트 등 생물학적 제제가 자리 잡은 만큼, 후발 신약이 시장을 가져오려면 차별화가 필요하다. 애브비는 주밀로키바트의 긴 약효 지속 시간과 투약 편의성에 주목한 배경이다.

일라이 릴리는 8월 31일(현지 시각) 메리다 바이오사이언스를 최대 28억7500만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릴리, 질병 일으키는 '자가항체' 직접 제거

일라이 릴리는 자가면역질환의 원인 물질을 직접 겨냥하는 기술에 베팅했다.

릴리는 지난달 31일(현지 시각) 메리다 바이오사이언스(Merida Biosciences, 이하 메리다)를 최대 28억7500만달러(약 3조83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메리다는 질병을 일으키는 자가항체를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대표 후보물질 'MER511'은 그레이브스병과 갑상샘안병증을 대상으로 개발 중이다.

메리다의 기술이 주목받는 이유는 질병의 원인이 되는 자가항체 자체를 겨냥한다는 데 있다. 그레이브스병에서는 갑상샘을 자극하는 자가항체가 과도한 갑상샘 호르몬 분비를 일으키는데, MER511은 이 자가항체를 선택적으로 제거하도록 설계됐다.

기존 치료제가 면역반응을 조절하거나 질병의 결과를 치료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메리다는 질병을 일으키는 항체를 직접 없애는 접근을 택한 것이다. 정상적인 면역 기능은 최대한 보존하는 것이 목표다.

릴리가 주목한 것도 이 부분이다. 특정 자가항체가 질병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여러 자가면역·알레르기 질환에 이 기술을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메리다는 그레이브스병 외에도 음식 알레르기·천식·만성 자발성 두드러기 등을 겨냥한 후보물질을 개발하고 있다.

독일 비버라흐의 베링거인겔하임 바이오의약품 생산공장에서 작업자들이 치료단백질을 만드는 발효탱크를 점검하고 있다. /베링거인겔하임

◇베링거, AI·데이터로 신약 발굴

베링거인겔하임은 지난 2일(현지 시각) AI 기업 오킨과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AI 신약개발 플랫폼 'K Pro'와 다중 환자 데이터를 활용해 암·면역질환 치료제 발굴을 가속하기로 했다.

오킨은 베링거에 종양학 관련 다중 환자 데이터를 제공하고, 면역질환 분야에서는 새로운 데이터를 생성하기로 했다.

베링거 연구진은 K Pro를 이용해 이 데이터를 분석하고 새로운 치료 가설을 만들거나 검증하고, 어떤 표적을 우선적으로 개발할지 판단하게 된다. 단순히 AI에 신약 개발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AI와 환자 데이터를 기존 연구진의 의사결정에 결합하는 방식이다.

앞서 베링거는 2025년 오킨과의 파일럿 프로젝트에서 종양 미세환경 데이터를 활용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이번 계약을 통해 이를 암·면역질환으로 확대한 셈이다.

글로벌 헬스케어 데이터·컨설팅 기업 아이큐비아(IQVIA)는 면역학 시장의 성장세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단, 면역학 분야에서도 질환군별 성장 양상이 엇갈릴 것이라고 봤다. IQVIA는 자가면역질환 분야는 바이오시밀러 확산과 경쟁 심화로 성장률이 둔화하는 반면, 아토피피부염·천식·알레르기 등 염증성 질환 분야는 향후 최소 5년간 두 자릿수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