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003850)·제일약품(271980)·대원제약(003220)·일동제약(249420) 등 국내 제약사 17곳이 빅파마 중 하나인 독일 베링거인겔하임(베링거)의 당뇨병 치료 성분 '리나글립틴' 관련 일부 특허가 무효라는 판단을 끌어냈다. 리나글립틴은 혈당 조절에 관여하는 효소를 억제해 제2형 당뇨병에 사용하는 성분이다. 리나글립틴 성분 자체를 보호하는 물질특허가 만료되면서 국내 제약사들은 제네릭(복제약)과 복합제를 출시했지만, 베링거가 특허 침해를 주장하자 분쟁이 본격화됐다.
2일 제약업계와 법조계 등에 따르면 특허법원은 지난달 13일 베링거가 보유한 '혈관보호성 및 심장보호성 항당뇨 치료요법' 특허 일부를 무효로 본 특허심판원의 판단을 유지했다. 해당 특허는 리나글립틴을 심혈관질환 위험이 높은 제2형 당뇨병 환자에게 사용하는 방법을 보호하는 용도특허다. 용도특허는 새로운 성분이 아니더라도 기존 의약품을 특정 질환이나 환자군에 사용하는 새로운 방법에 부여된다.
핵심은 리나글립틴을 심혈관 질환 위험이 높은 제2형 당뇨병 환자에게 단독 투여하거나 다른 치료제와 병용하는 데 있다. 적용 대상은 심근경색·관상동맥 질환·뇌졸중·심부전 등의 병력이 있거나 장기 손상, 고령, 고혈압·흡연·비만 등의 위험 요인을 가진 환자다.
◇특허 만료되자 국내 제약사 제네릭 출시…베링거가 제동
베링거의 리나글립틴 물질특허가 2024년 6월 만료되면서 보령, 제일약품, 대원제약, 일동제약 등 국내 제약사들은 리나글립틴 제네릭과 복합제를 잇따라 출시했다. 베링거는 물질특허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자 용도특허 침해를 주장하며 제동을 걸었다.
국내 제약사들은 기존에 알려진 치료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아 베링거의 용도특허는 유효성이 없다며 특허심판원에 무효 심판을 청구했다. 제2형 당뇨병 치료에 사용된다는 사실과 심혈관 질환 위험이 있는 환자에게 투여할 수 있다는 내용은 이미 알려졌다고 주장했다.
특허심판원은 지난해 국내 제약사들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였다. 베링거는 이 판단에 불복해 소송을 냈다. 특허 분쟁은 특허심판원이 1심 역할을 하고, 특허법원을 거쳐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된다. 베링거는 소송에서 "심혈관 질환 위험이 큰 당뇨병 환자는 일반 당뇨병 환자와 다르고, 이들에게 리나글립틴을 투여했을 때 나타나는 심혈관 보호 효과와 안전성은 기존 자료로 예상하기 어려운 치료 효과"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특허법원은 "선행 발명들을 보면 리나글립틴 투여와 치료 효과를 심혈관 질환 위험이 큰 환자군에서도 통상의 기술자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이어 "확인된 치료 효과 역시 선행 발명들로부터 예측할 수 없었던 현저한 효과라고 보기 어렵다"며 특허심판원 결정을 유지했다.
소송에서 패소한 베링거는 현재 대법원 상고 여부를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상고 기한은 4일까지다.
◇용도특허 일부 무효에도…제형 등 후속 분쟁은 계속
업계에서는 이번 판결을 리나글립틴 제네릭 사업을 둘러싼 특허 분쟁에서 국내 제약사들이 거둔 주요 성과로 평가한다. 베링거가 법정 공방을 이어가는 배경에는 특허 분쟁을 통한 시장 방어 전략이 깔려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소송에 참여한 한 국내 제약사 관계자는 "특허 만료를 앞둔 오리지널 의약품의 시장 독점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특허를 추가로 확보하거나 기존 특허를 근거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빅파마들이 활용해 온 전략"이라며 "이번 베링거 소송도 전형적인 시간 끌기 방식"이라고 말했다.
갈등의 여지는 아직 남아 있다. 베링거와 국내 제약사들은 용도특허 외에도 제형, 제조 방법, 조성물 등 여러 특허를 놓고도 다투고 있다. 특히 유효 성분을 실제 의약품으로 구현하는 구조와 배합 기술을 보호하는 제형특허 3건에서는 일부 국내 제약사가 패소했다.
또 다른 국내 제약사 관계자는 "제약사들은 특허 소송 결과에 따라 제품 제형을 변경하거나 판매 전략을 조정하는 방안 등을 검토해야 한다"며 "리나글립틴 제네릭 시장이 확대되고 있지만, 남아 있는 특허를 얼마나 해소하느냐가 향후 판매 확대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