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더 이상 경쟁 상대가 아니라 분석 대상입니다."
정회량 로슈 사업개발 이사는 28일 서울 강남구 웨스틴 서울 파르나스에서 열린 '제4회 삼성서울병원·에임드바이오 항체약물접합체(ADC) 콘퍼런스'에서 한국 바이오 기업들이 ADC 시장에서 중국과 경쟁하는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을 경쟁자로 보고 뒤쫓기 전에, 중국 기업들이 어떤 전략으로 얼마나 빠르게, 얼마의 비용을 들여 신약을 개발하는지 먼저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글로벌 시장에서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차별화 전략을 세울 수 있다는 설명이다.
글로벌 ADC 시장에서 중국의 존재감은 이미 압도적이다. 개발 비용은 미국의 3분의 1 수준이고 개발 속도는 두 배가량 빠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근 4년간 글로벌 시장에서 의미 있는 ADC 기술이전 거래의 80% 이상도 중국 기업에서 나왔다.
◇韓, '내 위치'부터 파악해야…중국은 더 빨리 다음 판 짠다
정 이사는 한국 기업들의 가장 큰 아쉬움으로 경쟁사 분석을 꼽았다. 그는 "한국 기업들을 만나 보면 '우리가 첫 번째' 혹은 '두 번째로 빠르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며 "실제로 경쟁 상황을 확인해 보면 15번째인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중국 기업들이 개발 정보를 충분히 공개하지 않아 실제 경쟁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운 측면은 있다. 그러나 이런 한계까지 감안해 글로벌 신약 개발 정보망 등을 활용하고, 경쟁 기업들의 후보물질 개발 상황을 계속 추적해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무엇을 공략할지 정하는 '표적 선정'도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정 이사는 "한국은 신약을 설계하고 최적화하는 기술 역량이 강하지만, 어떤 질병이나 암세포의 특성을 겨냥할지를 정하는 과정에서는 아쉬운 경우가 있었다"며 "앞으로는 중개의학 역량이 강한 회사가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중개의학은 연구실에서 나온 기초연구 성과를 실제 환자 치료로 연결하고, 반대로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새로운 의학적 문제를 다시 연구실로 가져가 해결책을 찾는 연구를 말한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중국 ADC 기업으로 눈을 돌리는 이유는 개발 비용이 싸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국 기업들은 하나의 페이로드(ADC가 암세포 안으로 전달하는 세포독성약물)에 의존하지 않는다. 암세포의 분열을 막는 약물부터 암세포의 DNA를 손상시키는 약물, 암세포의 성장 신호를 차단하는 약물까지 여러 종류의 '탑재 약물'을 확보하고 있다. 필요한 도구를 미리 갖춰 놓은 공구 상자처럼, 암 치료 표적에 따라 다양한 약물을 빠르게 조합해 시험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춘 것이다.
임상시험 데이터를 쌓는 속도도 빠르다. 정 이사는 "환자 5명 중 3명이 반응했다는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과, 50명 중 30명이 반응했다는 데이터를 빠르게 확보하는 것은 다르다"며 "중국 기업들은 더 많은 환자를 대상으로 더 신뢰도 높은 임상 데이터를 빠른 속도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비용 경쟁력도 높다. 정 이사가 인용한 분석에 따르면 후보물질 발굴부터 사람을 대상으로 한 초기 임상시험인 임상 1상 진입까지 미국에서는 5500만~9000만달러가 드는 반면, 중국은 1500만~3500만달러 수준이다. 개발 비용은 약 3분의 1이면서 속도는 두 배에 이른다는 설명이다.
그는 "ADC 개발의 성공률이 미국과 중국에서 비슷한 수준이라면 글로벌 제약사 입장에서는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빨리 개발할 수 있는 중국 기업을 선택할 유인이 크다"고 말했다.
정 이사는 중국 기업이 새로운 치료 표적을 먼저 찾아내는 능력도 뛰어나다고 봤다. 임상의와 사전에 논의하고, 인공지능(AI)과 유전체 분석 등을 활용해 앞으로 성공 가능성이 높은 표적을 일찍 찾아낸다는 것이다.
◇임상 자금도 병목…"그래도 혁신적 물질엔 기회 있어"
머크에서 ADC 신약개발을 이끌었던 한진환 리가켐바이오(141080) 최고기술책임자는 한국 바이오 기업의 구조적인 병목으로 자금 조달 문제를 지적했다.
많은 글로벌 제약사들이 실제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 데이터를 중요하게 보지만 상당수 국내 바이오 기업은 임상시험에 투입할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다.
한 CTO는 "투자자들은 빨리 기술수출해서 기업공개(IPO)를 하라고 하고, 기업은 돈이 없으니 임상에 들어가지 못한다"며 "임상 데이터가 없으니 다시 기술수출을 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바이오 산업은 하루아침에 돈을 넣고 바로 회수하는 산업이 아니다"며 "국가가 어떻게 지원할지, 자본이 어느 정도까지 위험을 함께 감수할지, 기업은 어떤 전략을 택할지에 대한 장기적인 큰 그림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 CTO는 "중국의 가장 큰 힘은 기업들이 임상시험에 빠르게 진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라며 "정부와 기업, 자본이 전반적으로 이를 지원하는 체제를 빠르게 구축했다"고 말했다.
다만 모든 글로벌 제약사가 임상 단계의 후보물질만 찾는 것은 아니다.
한정현 베링거인겔하임 사업개발 및 기술이전 전무는 혁신성이 충분하다면 임상시험 전 단계에서도 적극적으로 공동 개발이나 기술도입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그는 "중요한 것은 글로벌 기준에서 얼마나 엄격하고 일관된 과학적 데이터를 갖췄느냐"라며 "시험관이나 세포 수준에서 확인한 결과와 동물실험 결과가 서로 일관돼야 하고, 약물이 몸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독성은 어떤지, 사람에게 어느 정도 용량을 투여할 수 있을지까지 연결되는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7~8년 전과 비교하면 한국 바이오 기업들의 수준은 많이 올라왔다"며 "충분히 혁신적인 신약 후보물질을 갖췄다면 임상시험 전 단계에서도 글로벌 파트너를 찾을 기회가 있다"고 했다.
◇옥석 가리기 시작된 ADC 시장…"한국, '새 판' 짤 때"
이날 콘퍼런스에서는 ADC 시장이 여전히 성장하고 있지만, 글로벌 제약사들이 기업 인수나 기술도입을 결정하는 기준은 한층 높아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허남구 에임드바이오(0009K0) 대표는 "과거에는 ADC 실패 경험이 누적돼 글로벌 제약사들이 시장을 지켜보는 분위기였지만, '엔허투'가 등장한 2022년 이후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며 "허가받은 ADC를 가진 바이오 기업부터 사들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올해 들어 ADC 거래 건수 자체는 다소 줄었다. 그러나 시장에 나와 있는 차별화된 후보물질이 줄면서 개별 거래의 규모와 인수 기준은 오히려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허 대표는 "경쟁력 있고 차별화된 임상 단계 후보물질이 없어서 거래가 줄어든 것일 뿐, 좋은 후보물질이 있다면 글로벌 제약사들은 바로 사들일 준비가 돼 있다"며 "시장이 꺾인 것이 아니라 옥석 가리기가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글로벌 ADC 기술이전 시장은 새로운 탑재 약물과 두 종류의 약물을 함께 싣는 '이중 탑재' 방식, 두 개의 서로 다른 암세포 표적을 동시에 겨냥하는 ADC 등 차세대 기술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한 CTO는 "이미 짜인 판에 들어가 경쟁하는 것이 어려워졌다면 아예 새로운 판을 짜는 것도 방법"이라며 "ADC도 완벽한 치료 방식은 아니기 때문에 ADC 다음에 어떤 기술로 경쟁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를 지금부터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한국 바이오를 살리는 길은 혁신"이라며 "글로벌 시장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 위에서 새로운 기술로 승부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