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균이 항생제에 적응해 약물이 더 이상 제대로 듣지 않는 '항생제 내성' 문제가 세계 의학계의 주요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기존 항생제를 보완하거나 대체할 새로운 치료법을 찾기 위한 연구개발이 활발해지고 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국내 항생제 내성 관련 사망은 2021년 2만2700명으로 추산됐고, 2030년에는 3만2400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25년 2월 기준 전 세계에서 임상 또는 전임상 단계에 있는 항균제 후보물질은 90개로 집계됐다. 다만 이 중 혁신성을 인정받은 후보물질은 15개로 조사됐다.
국내에선 유전체 기반 미생물 진단 기업 세니젠(188260)이 항생제 내성을 극복할 차세대 향균제 개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회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책사업인 'K-HERO' 후속 연구개발 과제 주관기관으로 선정돼, 후보물질 발굴 연구에 본격 착수했다.
세니젠은 28일 서울 중구 정동1928 아트센터에서 '2026 엔도라이신 기반 차세대 항균제 심포지엄'을 열고 연구개발(R&D) 로드맵을 공개했다.
자연계에서 찾은 항균 물질을 선별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인공지능(AI)과 바이오파운드리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엔도라이신(Endolysin)을 만들어내는 접근법을 제시했다. 바이오파운드리는 AI와 로봇 등을 활용해 유전적으로 설계된 단백질이나 미생물을 대량으로 만들고 시험하는 자동화 연구 시스템이다.
◇항생제 내성균 잡는 '천연 무기'
세니젠이 주목한 물질은 '엔도라이신(endolysin)'이다.
엔도라이신은 세균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가 세균을 죽일 때 사용하는 효소 단백질이다. 박테리오파지가 세균 안에서 증식한 뒤 밖으로 빠져나갈 때 엔도라이신으로 세균의 세포벽을 분해한다.
세니젠 수석과학고문인 유상열 전 서울대 교수는 이날 발표에서 "박테리오파지는 항생제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균을 공격하기 때문에 항생제 내성균도 표적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항생제에 내성을 갖게 된 세균이라도 파지가 인식하는 표면 수용체가 유지돼 있다면 파지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엔도라이신이 대안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기존 항생제와 세균을 죽이는 방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박테리오파지는 동물이나 식물 세포를 감염시키지 않는 특성이 있어 새로운 항균 치료제로 개발할 가능성이 거론돼 왔다.
하지만 아직 엔도라이신을 활용한 치료제가 상용화된 사례는 없다. 미국 바이오기업 콘트라펙트가 개발한 엔도라이신 후보물질 'CF-301(엑세바카제)'은 초기 임상에서는 가능성을 보였지만, 이후 임상 3상에서 유효성을 입증하지 못해 시험이 조기 종료됐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엔도라이신은 박테리오파지가 자신의 숙주 세균을 지나치게 빨리 죽이지 않도록 살균력이 제한적인 점도 한계로 꼽힌다. 사람 몸속에서는 단백질 분해효소나 혈액 성분 등의 영향을 받아 활성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K-HERO' 국책과제로 선정…그람양성균 공략
세니젠은 이런 한계를 '2세대 키메라 엔도라이신' 기술로 극복한다는 계획이다.
유상열 세니젠 수석과학고문은 "치료제로 사용하려면 자연계 엔도라이신보다 더 높은 활성이 필요하고, 인체 안에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상용화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기존 1세대 방식은 자연계에서 박테리오파지를 대량으로 확보한 뒤 그 안에서 성능이 뛰어난 엔도라이신을 찾아내는 방식이었다.
세니젠은 자사가 보유한 균주 및 유전체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각 영역을 조합하고, AI를 통해 더 높은 살균력과 안정성을 갖도록 설계한다는 구상이다. 설계한 단백질은 바이오파운드리에서 빠르게 생산하고 성능을 검증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후보물질 가운데 살균력이 뛰어난 물질을 선별한 뒤 실제 인체와 유사한 환경에서 다시 검증할 예정이라고 회사는 설명했다.
세니젠의 'K-HERO' 연구과제는 2026년 7월부터 2029년 12월까지 42개월간 진행된다. 총사업비는 35억8680만원이며, 이 가운데 정부지원 연구비는 31억5000만원이다. 회사는 엔도라이신 신약 개발을 임상 진입 전 단계까지 국책과제를 통해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1차 목표는 그람양성 내성균이다. 세니젠은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장구균(Enterococcus), 연쇄상구균(Streptococcus) 등을 대상으로 후보물질을 개발할 계획이다. 이들 균은 패혈증 등을 일으키는 주요 병원성 세균으로 꼽힌다.
박정웅 세니젠 대표는 "1세대 엔도라이신 개발 과정에서 확보한 후보물질과 박테리오파지 연구 경험을 기반으로 2세대 엔도라이신 개발에 나설 것"이라며 "자연계에 존재하는 물질을 찾는 데 그치지 않고 AI를 활용해 원하는 특성을 가진 단백질을 설계하는 것이 이번 과제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실제 임상 개발 과정에서도 엔도라이신 후보물질의 효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개발이 중단된 사례가 있는 만큼, 추후 전임상에서 확인된 항균 활성을 임상적 유효성으로 연결하는 것이 핵심 과제가 될 전망이다.
이날 심포지엄 발표자로 나온 김민식 연세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그람음성균을 대상으로 하려면 외막을 뚫고 엔도라이신을 전달할 수 있는 별도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정웅 대표는 "기존 진단 사업을 통해 안정적인 현금 창출 기반을 확보한 만큼 앞으로는 분자진단을 더욱 간편하게 만드는 동시에 엔도라이신을 중심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바이오 신약 시장에 진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2005년 설립된 세니젠은 식중독균 등을 검사하는 분자진단 제품 150여 종을 상용화했으며, 1만종 이상의 균주와 2만건 이상의 유전체 정보를 확보하고 있다. 회사는 기존 진단 사업에서 확보한 미생물 유전체 데이터와 균주 라이브러리를 신약 개발에 활용한다는 전략이다.